루이비통도 반한 숲 속 미술관…벚꽃과 함께 열고 눈 오면 닫는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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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연 속의 미술관 2부]2018년 5월, 루이비통의 새 시즌 컬렉션을 차려입은 모델들이 터널을 빠져나와 끝없이 펼쳐진 긴 다리를 런웨이 삼아 걷는다. 저 멀리 터널 너머에는 일본 전통가옥과 녹음이 가득한 울창한 숲이 보인다. 터널과 다리는 인위적인 세트장이 아니다. 일본 교토 시가라키 산 중턱에 있는 미호박물관이다. 이곳에 가려면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모델들이 걸었던 긴 다리를 건너야 한다.
일본에서 만나는 대자연의 미술관
미호뮤지엄에서 하코네 조각미술관까지
1997년 개관한 미호박물관은 중국계 미국인인 건축 거장 이오밍 페이(I. M. 페이)가 설계했다. 페이는 파리 루브르박물관 유리 지붕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1933년 제임스 힐턴의 영화 ‘잃어버린 지평선’ 속 가상의 장소 ‘샹그릴라’에 큰 감동을 받았다. 그는 시가라키 산에 샹그릴라를 구현한 미호박물관을 구상했다. 당시 루이비통 감독이던 니콜라 게스키에르는 미호박물관을 찾은 뒤 자연과 건축이 주는 시너지에 완벽히 매료됐다고. 모든 컬렉션을 장소에 맞춰 디자인했을 정도로 이곳을 사랑했다고 전해진다.꽃과 함께 피어나는 '미호박물관’
미호박물관은 교토 시내에서 차로 1시간 이상 걸릴 만큼 깊은 숲속에 있다. 미술관으로 향하는 양쪽 길에는 일본의 상징과도 같은 벚나무와 버드나무가 빼곡히 자리 잡고 있다. 3월 개화가 절정을 맞는 시기에 봄 전시를 관람하러 이곳을 찾는다면 ‘벚꽃 전시’도 함께 관람할 수 있는 셈이다. 하염없이 벚나무 길을 걷다 보면 미술관의 1차 관문인 터널이 등장한다. 페이가 터널을 지을 때 가장 먼저 고려한 것은 소리와 빛의 모양이다. 터널이지만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사람의 음성은 최대한 울리지 않도록 했고, 길잡이가 돼주는 양쪽 조명은 지평선처럼 일직선을 이룬다. 봄 시즌에는 자연 속 벚꽃의 분홍빛과 조명이 어우러져 터널 끝에 다다르면 핑크빛 오로라 장관이 펼쳐진다.터널을 빠져나오면 펼쳐지는 다리에서 또 한 번 놀란다. 숲을 최대한 보존하며 미술관을 짓기 위해 다리 하단부를 지탱하는 하방 구조물을 설치하지 않았다. 대신 터널 양쪽에 기다란 줄을 수십 개 달아놓은 구조가 눈에 들어온다. 다리 밑 나무들이 장애물 없이 계속 자라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방법이다.미술관 본관을 설계할 때 페이가 내세운 세 가지 원칙은 ‘자연과 건축, 그리고 미술품’이었다. 그는 80% 이상의 건축물을 땅속에 건설하고 그 위에 다시 자연을 복원하는 실험을 했다. 건축물 자체를 또 하나의 자연이 되도록 구상한 것이다. 지붕은 모두 유리로 만들어 지하에서도 인위적인 조명 대신 밝은 태양 빛을 만끽할 수 있도록 했다.
지상층으로 들어서면 지붕에서 자연광이 쏟아지고 미술관 창문을 통해서는 산속 전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건물 안에 있지만 산속에 파묻힌 듯한 해방감을 선사하기 위해 고안한 구조다. 대자연 속의 미호박물관은 겨울마다 ‘동면’에 들어간다. 올해도 3월 15일까지 전시가 열리지 않는다. 벚꽃 개화와 함께 새 전시로 돌아올 예정이다.쓰레기섬에 파묻은 '지중미술관’
시코쿠 가가와현, '쓰레기섬’이란 오명이 붙었던 작은 섬 나오시마에도 건축 거장 안도 다다오의 손길이 닿은 자연 속 미술관이 있다. '지중미술관(地中美術館)’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미술관 건물 대부분이 땅 중간에 묻혀 있다. 지면 위에 드러난 건 미술관임을 알려주는 팻말과 자연광을 받기 위해 만들어놓은 유리 지붕 정도가 전부다. 안도 다다오는 지면 위에 뿌리내린 나무와 풀, 꽃은 모두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라 자연의 것이라는 신념으로 이 미술관을 건축했다. 땅 위에서 숨 쉬는 모든 존재를 최대한 건드리지 않은 채 깊은 지면 아래에서 자신만의 건축 세계를 펼쳤다.미술관 내부, 땅속으로 내려가면 흰 벽을 타고 태양 빛이 스민다. 모든 천장과 벽 사이에 작게 틈을 내 그 사이로 자연의 빛이 들어온다. 전시장 벽에 길을 안내하기 위해 쓰인 작은 램프 외에는 별다른 조명을 쓰지 않았다. 땅속 미술관인 만큼 ‘어둠의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하기 위한 그의 철학이다. 어둠 속에서 작은 빛에 의지해 전시장 복도를 걷다 보면 땅속 세계와 함께 호흡하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클로드 모네의 작품 ‘수련’이 걸린 전시장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밝은 빛이 등장한다. 천장의 작은 틈을 통해 들어오는 작은 빛이지만, 지중(地中) 어둠에 익숙해진 관객은 강렬한 빛의 대비를 느끼게 된다.
일본 최초 야외 미술관 '하코네 조각의 숲’
가나가와현 하코네 깊은 숲속에도 미술관이 존재한다. 1969년 문을 열어 올해로 개관 55주년을 맞은 '하코네 조각의 숲 미술관’이다. 본래 하코네 국립공원이던 장소를 훼손 없이 그대로 가져와 야외 미술관을 지었다. 그래서인지 숲이 선사하는 웅장한 대자연 사이에 놓인 대형 조각 작품을 관람할 수 있다. 조각의 숲 미술관은 일본 최초의 야외 미술관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은 곳이기도 하다. 조각의 숲 미술관의 하이라이트는 평지 한가운데 세워진 ‘우드 오브 네스트’로 나무로 만들어진 둥지다. 관객은 커다란 나무 둥지 안으로 직접 들어가 볼 수 있다. 야외 평지 위에 나무로 지어졌기 때문에 날씨와 계절 변화에 따라 공기에 흐르는 냄새와 빛의 모양이 모두 다르게 느껴진다.미술관의 가장 끝자락엔 '행복을 부르는 심포니 조각’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놓여 있다. 작품이면서 동시에 전망대 역할을 한다. 작품 안으로 들어선 관객은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로 꾸며진 벽면과 한가운데 놓인 나선형 계단을 만난다. 계단을 끝없이 오르다 보면 작품의 정상에 도달한다. 꼭대기에 올라서면 자연에 파묻힌 미술관 모습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저 멀리 보이는 온천과 마을의 모습도 구경할 수 있다. 구름이 자욱한 날에는 구름을 밟고 올라서서 산 밑을 내려다보는 느낌이 든다.
시라가키·하코네=최지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