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50도 검푸른 빙판에 외로이 선 카메라...영화 '하얼빈' 미장센의 비밀

영화 우민호 감독, 홍경표 촬영감독 인터뷰
CG 없이 탄생시킨 미장센 장인의 명장면 뒷이야기
영화를 무대예술과 구분 짓는 건 카메라다. 관객은 카메라의 시선으로 영화를 본다. '미장센(mise-en-scène)’의 함수는 복잡하지만, 그 미학을 꿰뚫는 본질은 간명하다. 요약하면 이렇다. ‘모든 영화적 요소가 카메라 프레임 안으로 얼마나 완벽하게 포섭됐는가.’ 거장 반열에 오른 감독 옆엔 늘 최고의 촬영감독이 서 있는 이유다. 컷은 잘게 쪼개지고 온갖 CG(컴퓨터그래픽)가 범벅돼 정신없는 요즘, 스크린에서도 결국 울림을 주는 건 메가폰을 쥔 감독과 카메라를 든 촬영감독의 호흡이다.

지난달 24일 개봉 후 연일 박스오피스 1위를 지키는 영화 <하얼빈>의 힘도 여기서 나온다. 영화 관람평은 엇갈리지만 마치 클래식 명화전을 보는 듯한 빼어난 영상미학에는 이견 없이 찬사가 쏟아졌다. "모든 장면이 숭고한 그림 같아야 한다”며 영화적 모험에 나선 우민호(54) 감독의 여정에 홍경표(63) 촬영감독이 함께한 결과다. 지난 7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두 사람은 "더블 인터뷰는 난생처음”이라며 어색해하던 것도 잠시, 언제 그랬냐는 듯 촬영 에피소드를 쏟아내며 남다른 동지 의식을 나타냈다.▶▶[관련 인터뷰] "얼음판 걷는 안중근의 고뇌 담았죠… 명화처럼 클래식하게"
영화 &lt;하얼빈&gt;을 제작한 우민호 감독(오른쪽)과 홍경표 촬영감독 / 사진. ⓒ이솔 기자
'아리 알렉사 65’ 집어 든 홍경표

<하얼빈>에선 시종일관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극적인 명암 대비가 돋보였다. 담배 연기 자욱한 지하실에서 독립군이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운 채 격론을 벌이고, 햇빛이 비치지 않는 방 한편 어둠에 잠긴 안중근이 고해성사하듯 무릎을 꿇자 강렬한 햇빛이 창문으로 쏟아진다.홍 촬영감독은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바로크 거장인 카라바조의 ‘의심하는 도마’와 '성 마태오의 소명’ 같은 회화를 떠올렸다”고 말했다. 고뇌하고 두려움에 떨었을 100여 년 전 독립투사를 숭고하게 담고 싶다는 우 감독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우 감독은 "그 당시 독립투사들은 어둠의 존재로 빛을 되찾기 위해 나아가지 않았겠느냐”고 덧붙였다.
영화 '하얼빈'의 한 장면. 홍경표 촬영감독은 독립투사를 숭고하게 그려내고 싶다는 우민호 감독의 의도를 담아, 카라바조의 그림처럼 극적인 명암 대비가 돋보이도록 했다.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독립군이 모여 회의할 때나 일본군과 뒤엉켜 전투를 벌일 때 와이드 앵글로 담아낸 장면들도 인상적이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걸작 <카게무샤>(1980)가 떠오를 정도로 고전적 영상미학에 가깝기 때문이다. "안중근과 동지들이 겪은 분위기를 한 샷에 담고 싶다”는 우 감독의 주문에 홍 촬영감독이 꺼내든 건 '아리 알렉사 65’. 하루 대여료만 1000만원이 넘는 카메라로, 할리우드 <듄> 시리즈 등에서 쓰인 최고의 촬영 장비다. 홍 촬영감독은 "영화 <기생충>에 쓰인 카메라”라며 "무겁고 다루기 쉽지 않지만, 디테일이 워낙 좋고 필름 질감이 다르다 보니 멀리서도 인물의 서로 다른 표정을 담아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하얼빈>은 '아리 알렉사 65' 단 한 대로 모든 촬영을 했다. 홍 촬영감독 촬영 기술의 백미는 안중근이 시릴 정도로 푸른 빙판 위를 걷는 장면. 몽골 북부 홉스굴 호수에서 촬영한 이 장면은 특수효과 없이 촬영으로만 완성했다. 우 감독이 "영하 40~50도까지 내려가는 곳에서 저는 모니터 앞에 앉고, 홍 촬영감독은 현장 앞에 앉아 하염없이 바람과 햇빛을 기다렸다”며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꺼내자 홍 촬영감독은 "기다림 끝에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 눈발과 함께 마치 보이는 것 같은 바람까지 담아낼 수 있었다”며 “상업영화, 예술영화 같은 범주로 나누고 싶지 않은 이유”라고 맞받았다.▶▶[관련 리뷰]흔들리고 방황하는 ‘인간 안중근’이 묻는다…“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관련 리뷰] 청년 안중근의 갈등과 딜레마...어둠 속에서 빛을 품고 나아간 여정
영화 &lt;하얼빈&gt;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같이 찍읍시다” 우민호 제안에…홍경표 "시나리오부터”

이날 인터뷰에서 우 감독은 <하얼빈>을 연출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홍 촬영감독을 모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홍 촬영감독이 <마더>부터 <설국열차> <기생충>까지 봉준호 감독과의 세 차례 작업을 비롯해 곽경택 <태풍>, 나홍진 <곡성>, 강제규 <태극기 휘날리며> 등 하나같이 걸작으로 평가받은 거장들의 작품을 함께한 베테랑이기 때문이다.우 감독은 "입봉작인 <파괴된 사나이>를 제작할 때부터 자택을 찾아가 대본을 건넬 정도로 존경했다”며 "시대 트렌드에 역행하고 지루하다는 평가가 나올 수 있지만 안중근 장군의 고뇌와 방황을 숭고하게 담고 싶었던 터라 함께해달라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이에 홍 감독은 "전작들을 좋게 보기도 했고, 우민호 급 감독이라면 시나리오를 보지 않고도 흔쾌히 할 수 있었는데도 쉽지 않은 영화라는 생각에 '시나리오부터 보자’고 했다”며 멋쩍은 듯 웃었다. 이어 "막상 만나보니 취향도, 성격도 잘 맞아 몽골, 러시아를 오가는 고된 촬영 일정에도 아무런 갈등이 없었다”며 "다른 시나리오에서 만나면 장담할 순 없겠지만 <하얼빈>에서만큼은 최고의 호흡이었다”고 말했다.
우민호 감독(오른쪽)과 홍경표 촬영감독의 촬영현장
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