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금융위기 이후 '최대 악재'…"1976년 IMF 떠올라" 경고

10년물 英 국채 가격 2008년 이후 최저
노동당 '대규모 채권 발행' 예고 이후 하락세
물가 반등 우려에 英 기준금리 인하도 '주춤'

"트러스 사태와 달라…미국채 따라갈 뿐" 의견도
영-미 채권 스프레드 반년 전과 같아
독일·일본 등 주요국 채권 가격도 하락세
영국 런던 시민이 9일(현지시간) 금융지구가 보이는 페티코트 레인마켓을 걸어가고 있다. AFP
영국 국채 시장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악의 위기를 맞았다. 벤치마크인 10년물 국채 가격이 15년 만에 최저치로 떨어졌고 30년 장기 국채 가격도 1998년 이래 가장 낮다. 노동당 내각의 예산안 충격과 물가 반등 우려, 미 국채 매도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대규모 채권발행·물가 반등에 국채금리 급등

CNBC에 따르면 9일(현지시간) 10년물 영국 국채금리는 0.011%포인트 오른(국채 가격 하락) 연 4.823%에 거래를 마쳤다. 지난 3달 간 약 0.6%포인트, 1년 간 1%포인트 가량 올라 2010년 이래 최고치를 경신했다. 30년물 금리도 이날 0.095%포인트 오른 연 5.448%로 27년만에 최고 수준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 반년 영국(노란색) 미국(초록색) 독일(파란색) 10년물 국채금리 추이. 오른쪽 척도(단위:연 %)는 영국·미국, 왼쪽은 독일 기준이다. /=트레이딩이코노믹스
앤드류 피스 러셀인베스트먼트 수석 투자전략가는 "세계적인 (국채) 매도세이지만 영국에서는 경기 침체와 인플레이션 고착화, 재정 전망 악화 등이 반영됐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10월 노동당 내각이 발표한 2024회계연도(2024년4월-2025년 3월) 예산안은 국채 매도세의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당시 레이첼 리브스 재무장관은 향후 5년간 공공지출을 연 700억파운드(약 125조6000억원) 늘릴 계획이며 이를 위해 2024회계연도에 2970억파운드, 향후 5년간 1420억파운드의 추가 국채를 발행한다고 밝혔다. 시장 예상보다 큰 국채 발행 규모는 채권 가격 하락을 유발했다.

최근에는 채권 추가 발행 우려도 커지고 있다. 레이첼 재무장관은 예산안 발표 당시 99억파운드 규모의 재정적 여유가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채권 금리가 급등하고 400억파운드 규모의 증세로 성장이 정체될 조짐을 보이면서 시장은 이러한 여유 자금이 소진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대규모 채권 발행이 채권 금리를 급등시키고, 그 이자를 메우기 위한 추가 채권을 발행해야하는 악순환에 빠진 것이다. 영국 예산청(OBR)은 오는 3월 채권 금리 변동을 반영한 새 재정 전망을 발표한다.다시 치솟는 물가도 채권 금리의 상승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지난달 발표된 영국 11월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2.6%로 전월보다 0.3%포인트 올랐다. 지난해 1월부터 둔화하던 영국 물가상승률이 U자 형태로 다시 오른 것이다. 이에 금리인하 사이클에 접어든 영란은행이 기준금리를 동결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정책 금리는 단기 국채 금리와 연동돼있고, 단기 국채 금리 상승은 장기 금리를 밀어올린다.

이날 달러 대비 파운드화 환율은 한때 14개월 만에 최저치인 1.22 파운드까지 떨어졌다. 통상 영국채 금리가 오르면 파운드화 가치가 오르지만, 정부 재정에 대한 투자자들의 우려가 반영되면서 파운드화가 떨어진 것이다. 마틴 웨일 킹스칼리지런던 경제학 교수는 "1976년 이후 파운드화가 하락하고 장기 국채 금리가 급등하는 악성 조합은 발생한 적이 없다"라고 지적했다. 영국은 1976년 경제·통화 위기가 겹치며 서유럽 국가 최초로 39억달러 규모의 IMF 구제금융을 받았다.

"영국은 미국 따라갈 뿐" 외부요인 분석도

영국채 매도세의 원인이 국내보다는 국제 국채 시장을 뒤흔들고 있는 미 국채 부진에 있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조지 사라벨로스 도이치뱅크 외환 최고책임자는 "리즈 트러스 전 총리가 일으킨 채권 시장 위기는 내각이 주도한 정책 충격이었지만, 이번에는 미 국채를 따라 움직이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미국 및 영국 10년물 국채 금리 차이(스프레드·파란색선)와 달러 대비 파운드화 환율(빨간색 선) 추이. 2022년 9월 '리즈 트러스 사태' 때(왼쪽 원)는 정부 리스크가 부각되며 영국 채권금리가 급등, 스프레드가 벌어졌으나 지난 3개월 동안(오른쪽 원)은 양국 국채금리가 함께 오르며 스프레드가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매크로마이크로
사라벨로스 최고책임자는 현재 10년 만기 미·영 국채 금리차(스프레드)가 반년 전과 같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트러스 전 총리가 2022년 450억파운드(약 81조원) 규모 감세안을 발표하면서 채권 가격이 폭락할 때는 영국채 금리만 급등하면서 스프레드가 벌어졌다.

사라 브리든 영란은행 부총재 역시 "영국 채권 시장은 질서있게 움직였다"라며 "더 넓은 글로벌 요인을 반영했다"라고 설명했다. 최근 연 5%대를 향해 치솟고 있는 미국채 금리는 독일·일본 등 주요국 채권 시장도 흔들고 있다. 이날 일본 10년물 국채 금리는 13년 만에 최고치인 연 1.181%를 기록했다. 독일 10년물 국채 금리도 반년 만에 가장 높은 연 2.531%로 올랐다. 투자전문매체 배런스는 "세계 채권시장의 불안은 미국의 책임"이라고 진단했다.

김인엽 기자 insid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