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규칙은 엄격해야 할까, 융통성이 있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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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A18
세상을 움직이는 '규칙'의 역사세상은 규칙으로 이뤄져 있다. 교통신호뿐 아니라 분리배출 방법, 근무 시간, 기내 수화물 허용 규정, 식기류 놓는 위치 등 모든 것에 규칙이 있다.
중세까지 우세했던 두꺼운 규칙
예시·재량권 허용 등 모두 기재
현대엔 엄격한 얇은 규칙 대세
질서 유지·예측 가능성 높지만
예외 필요 상황도 생겨 딜레마
"AI 시대에도 해결 못 할 문제"
알고리즘,
패러다임, 법
로레인 대스턴 지음/ 홍성욱·황정하 옮김
까치 / 464쪽|2만3000원
규칙은 언제 생겨났을까. 왜 사람들은 이를 따를까. 저명한 과학사학자인 로레인 대스턴 막스플랑크과학사연구소 명예소장도 궁금했다. 그가 독일 북부 해변에 갔을 때다. 입구에 규칙이 적혀 있고, 구역을 지정해 놨다. 사람을 위한 곳, 개를 데려온 사람을 위한 곳, 비치발리볼 같은 스포츠를 즐기고 싶은 사람을 위한 곳 등이었다.그는 대부분의 사람이 해변의 규칙을 따르는 데 놀랐고, 이후 규칙의 역사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알고리즘, 패러다임, 법>은 그 결과물이다. 우리가 당연하게만 생각한 규칙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하는 책이다.
규칙은 다른 사람을 따라 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아이들은 예절책을 공부해 ‘고맙습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주변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관찰하고 모방한다. 어른도 마찬가지다. 잘 모르는 외국 식당에 갔을 때 우리는 주변 사람을 살핀다. 웨이터를 어떻게 부르는지, 주문은 어떻게 하는지, 음식은 어떤 방식으로 먹는지. 이를 ‘모델로서의 규칙’이라고 한다.하지만 복잡한 세상에선 한계가 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명문화 규칙이다. 여기서 저자는 핵심 개념을 꺼내 든다. 바로 ‘얇은 규칙’과 ‘두꺼운 규칙’이다. 얇은 규칙은 명확하고 모호함이 없다. 체스 규칙이 그 예다. 비숍은 대각선으로 몇 칸이든 움직일 수 있고, 나이트는 L자 모양으로 움직인다는 식이다.
수백 년 전 체스 규칙 책은 더 두꺼웠다. 비숍과 나이트가 움직이는 방법을 설명하지만 예외 조항, 단서 조항 등이 여럿 붙었다. 상대방이 나이트에 심리적으로 애착할 때 상대 나이트를 차지하려면 자신의 비숍을 희생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식이다. 이렇게 두꺼운 규칙은 예시, 예외 조항, 문제, 단서 조항, 주의 사항, 재량권의 필요성 등을 모두 기재했다.
두꺼운 규칙은 중세 시대까지 유럽에서 우세했다. 7세기 수도원장은 ‘성 베네딕토의 규칙서’(수도사가 지켜야 하는 계율)를 적용하는 방법에 상당한 재량권을 가졌다. 그러다 근대 이후 얇은 규칙이 선호됐다. 모호함이 없고, 규칙 적용의 예측 가능성이 큰 덕이었다.또 얇은 규칙은 두꺼운 규칙과 달리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다. 2005년부터 지금까지 미국 대법원장을 맡아온 존 로버츠는 한 의견서에 이렇게 썼다. “내가 당신에게 예외를 인정하면 모든 사람에게 예외를 둬야 하므로 예외는 없습니다.” 예외를 허용하기 시작하면 규칙이 무너지고 사회 무질서가 확산할 것이란 우려를 나타낸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두꺼운 규칙과 얇은 규칙 사이에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가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얇은 규칙은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도둑이 부자의 식탁에서 빵 한 덩어리를 훔친 가난한 사람이고, 굶주린 데다 일자리도 구할 수 없었다면 어떨까. 법의 엄중함으로 처벌해야 할까, 자비의 이름으로 예외를 인정해야 할까. 이는 수 세기 동안 도덕철학자, 신학자, 법학자, 소설가를 괴롭힌 문제였다.
얇은 규칙의 일종인 컴퓨터 알고리즘도 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앞으로 인공지능(AI)이 발달하더라도 컴퓨터에 모든 판단을 맡기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대 정치에서 통치자의 재량권을 어느 정도로 인정해야 하는지도 비슷한 문제다. 그 어떤 입법자도 미래의 모든 상황을 예견할 수 없고, 그로 인해 모든 법은 예외를 맞닥뜨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규칙이 너무 구체적이면 오히려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1300년대부터 1800년대까지 이어진 유럽의 사치 금지법이 그랬다. 12세기 제노아의 검은담비 장식 금지, 15세기 페라라의 찢어진 소매 금지, 17세기 프랑스 파리의 금 단추 금지는 독창적인 회피와 과격한 반항 끝에 모두 실패로 끝났다.
규칙을 지키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고민하게 되는 시기에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책이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