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칼럼] 한국은 엄두도 못낸 아르헨식 '밸류업'

메르발지수 작년 172% 올라
정부 구조조정, 규제 완화 등
주가 상승 겨냥한 정책 없지만
경제 체질 개선 기대에 급등

구조개혁 말뿐인 한국과 대조
정국 혼란에 시간 또 허비

유승호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작년 한 해 주가지수가 거의 세 배로 오른 나라가 있다. 한국에서 지구 정반대편에 있는 아르헨티나다. 아르헨티나의 대표 주가지수인 메르발(MERVAL)지수는 지난해 무려 172.52% 상승했다. 작년 1년간 10% 가까이 내린 코스피지수는 말할 것도 없고 S&P500지수(23.31%)의 7배가 넘는 불장이었다. 새해 들어서도 10%대 오름세다.

메르발지수의 급등세는 언뜻 보면 이해하기 힘든 면이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추정한 작년 아르헨티나 경제성장률은 -3.8%다. 상대적 빈곤율은 50%가 넘는다. 더구나 아르헨티나는 채무 불이행 선언을 밥 먹듯이 하는 나라다. 그럼에도 주가가 날아오른 이유가 있다. 작년 12월 취임 1년을 넘긴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의 개혁 정책이다. 선거 유세 때 가죽 재킷 차림에 전기톱을 들고나와 다소 우스꽝스럽게 비치기도 했던 인물이다. 그 전기톱 퍼포먼스는 허세가 아니었다.
취임 후 기존 18개이던 정부 부처를 8개로 줄이고 공무원을 5만 명 넘게 해고했다. 전기·가스 요금과 대중교통 요금에 지급하던 보조금을 중단하고 은퇴자에게 주는 연금은 동결했다. 작년 물가 상승률이 200%에 달한 점을 감안하면 연금을 3분의 1로 깎은 것이나 다름없다.

허리띠 졸라매기만 한 것은 아니다. 정부 부처를 통폐합하는 와중에도 규제 완화를 담당하는 부처는 신설해 각종 규제를 폐지하거나 완화했다. 임업, 관광, 에너지, 철강 등의 산업에 2억달러 이상 투자한 기업에 법인세율을 10%포인트 인하해 주는 등 투자 촉진을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파열음이 뒤따르기는 했다. 지하철 요금은 여섯 배로 올랐고 소고기가 세계에서 가장 싸다는 나라의 1인당 소고기 소비량이 100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감소했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 연금이 줄어든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다. 하지만 고강도 긴축의 결과 만성 재정적자 국가가 재정흑자를 내기 시작했다. 무분별한 돈 풀기를 중단하자 전월 대비 25%에 이르던 물가상승률은 3% 안팎으로 내려왔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아르헨티나 경제가 5% 이상 성장할 것으로 전망한다.

밀레이 대통령의 주요 정책 중 주가 상승을 직접 겨냥한 것은 없다. 다만 강력한 개혁으로 아르헨티나의 경제 체질이 바뀔 수 있겠다는 기대가 주가를 밀어 올렸다. 그중에는 한국도 벤치마킹할 만한 것이 많다. 사실은 한국도 오래전부터 하려고는 했지만, 차일피일 미뤄 온 것이 대부분이다.

대표적인 것이 공공부문 개혁과 규제 완화다. 한국의 역대 정부 중에 공공부문 개혁과 규제 완화를 말하지 않은 정부는 거의 없다. 하지만 앞에서는 공공부문 개혁을 외치면서 뒤에서는 정부 조직을 확대하고 공공기관을 늘렸다. 윤석열 정부 들어 공무원 정원이 줄었다지만, 2년간 감소폭은 5000명으로 전체의 1%도 안 된다.에너지 공기업의 적자와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도 공공요금 정상화는 언제나 정치 논리에 밀린다. 시한폭탄 같은 국민연금 개혁은 또 메아리만 치고 끝나 가는 분위기다. 재정수지는 작년까지 17년 연속 적자를 기록했고, 올해도 국내총생산(GDP)의 3%에 가까운 적자가 예정돼 있다. 투자 촉진은커녕 반도체산업 지원을 위한 법안조차 ‘대기업 특혜’ 시비에 발목이 잡힌다.

아르헨티나 의회는 여당이 하원 257석 중 40석, 상원 72석 중 7석만을 차지한 극단적인 여소야대다. 밀레이 대통령은 야당을 향해 “개혁에 반대하면 국민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며 큰소리치기도 하고, 중도 성향 의원들을 설득하기도 하면서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에선 그런 대화와 타협, 설득의 정치 리더십을 기대하기 어렵게 된 지 꽤 됐다.

물론 한국과 아르헨티나를 단순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다. 경제 규모와 소득 수준, 재정 여건이 모두 다르다. 밀레이 대통령의 개혁 조치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정도로 병이 깊어진 상황에서 나온 극단적 처방이라고 봐야 한다. 개혁이 성공했다고 결론 내기도 아직은 이르다.그러나 연 2% 이하로 떨어진 잠재성장률, 초저출산과 급속한 고령화, 매년 늘어가는 국가 채무 등을 생각하면 우리는 상황이 다르다며 안심할 수 없다. 온 나라가 계엄과 탄핵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으니 개혁 시계가 얼마나 더 뒤로 늦춰질지 알 수 없게 됐다. 한국은 아르헨티나식 ‘밸류업’을 할 수 없는 걸까.

아득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