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반구와 비주류 예술 약진
여성 작가들이 이끄는 대형 기획전 주목
김아영·서도호 등 한국 작가들의 해외 진출 활발
패션과 영화가 융합된 이색 전시들도 눈길
돌체앤가바나부터 웨스 앤더슨까지. 2025년 세계 주요 미술 무대에서 열리는 전시를 정리했다.
새로움을 향한 갈망은 예술인들의 오랜 숙제다. 과정이 마냥 순탄하진 않다. 인상주의를 개척한 모네의 '인상, 해돋이'는 당시만 해도 미완성 그림이란 비아냥을 들었다. 아카데미 미술에 반기를 든 빈 분리파 화가들은 '앙팡 테리블(악동)' 대접을 받았다. 전시조차 거부당한 뒤샹의 '샘'은 또 어떤가.눈 밝은 이들은 이미 새로운 장르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 '비백인, 여성, 이방인'으로 대표되는 비주류 예술이다. 그동안 서구권 남성 작가들이 독점하다시피 했던 흐름에서 벗어난 참신함을 향한 갈증이 반영된 것이다. 최근 들어 한국 미술의 국제적인 위상이 훌쩍 뛴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올해 미술 무대는 누구한테 자리를 내줄까. 얼핏 보면 기상천외하지만, 그만큼 도발적이고 혁신적인 작가들이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2025년 세계 각지에서 열리는 주요 전시를 '이방인'과 '여성', '한국미술', '탈경계'라는 네 가지 키워드로 정리했다.
빈센트 반 고흐의 'Wheatfield With Crows'(1890). 반고흐미술관 제공이방인은 어디에나 있다지난해 세계 최대의 미술 축제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화두는 이방인이었다. 남미 출신으로선 미술전 역사상 처음으로 예술감독에 임명된 아드리아노 페드로사는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는 대주제를 내걸었다. 최고 권위인 황금사자상도 호주 국가관과 뉴질랜드 원주민 그룹 '마타아호 컬렉티브' 등 남반구가 휩쓸었다. 내년에 열릴 다음 미술전에선 남아공의 코요 쿠오가 최초의 흑인 여성 예술감독으로 내정됐다.
2월 27일부터 8월 31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는 '살아있는 예술 오브제'로도 꼽히는 보웨리의 작품세계 전반을 다룬다. 그의 패션 의상부터 회화, 사진과 영상을 넘나든다. 전시의 백미는 딕 주웰의 'What's Your Reaction to the Show?'(1988). 거대한 유리 상자 안에 들어간 보웨리를 행인들이 감상하는 과정을 녹화한 영상 작업이다.
Hilda Rix Nicholas,'The pink scarf'(1913). Art Gallery of South Australia, Adelaid. /아트 갤러리 오브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 제공남반구 방문을 계획 중이라면 아트 갤러리 오브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의 'Dangerously Modern: Australian Women Artists in Europe (1890~1940)'을 찾아볼 것을 권한다. 고국 호주를 떠나 유럽에서 활동한 여성 모더니즘 작가 50명을 조명하는 그룹전이다. 전시는 3월 24일~9월 7일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열린 뒤 시드니로 무대로 옮긴다.
Grace Crowley, 'Miss Gwen Ridley'(1930). Art Gallery of
South Australia, Adelaide. /아트 갤러리 오브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 제공.여성 작가들의 약진
여성 작가들의 굵직한 기획전들도 눈여겨볼 포인트다.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은 현대미술가 제니 사빌(54)의 기획전 '제니 사빌: 그림의 해부학(Jenny Sauvile: The Anatomy of Painting)'을 연다. 영국에서 열리는 작가의 첫 대규모 미술관 전시로 6월 20일부터 9월 7일까지다.대형 캔버스에 얼룩덜룩하게 그린 그의 누드화는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이상적인 몸매가 아니라 비만이거나 추한 여성, 트랜스젠더를 주로 다룬다. 미술계의 반응은 뜨겁다. 군살이 잔뜩 붙은 여성을 그린 'Propped'(1992)가 2018년 소더비 경매에서 950만유로(약 142억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살아있는 여성 작가 작품 중 역대 최고 기록이다.
미카엘리나 바우티에 'Triumph of Bacchus'(1643~1659).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 /퍼블릭 도메인바우티에의 유산이 제대로 평가받기 시작한 건 2010년대에 이르러서다.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작품 대부분이 다른 남성 예술가들의 공으로 둔갑했기 때문이다. 대표작 '바쿠스의 승리'의 우측 구석에는 유난히 빛나는 한 여성이 그려져 있다. 남성 중심적인 예술계에 홀로 서 있던 화가의 모습을 투영한 것이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은 일본계 미국 작가 루스 아사와(1926~2013)의 회고전(Ruth Asawa: A Retrospective)을 준비했다. 지난해 10월 미국 정부에서 국가예술 훈장을 수여할 정도로 최근 재조명받는 작가다. 이번 전시는 작가를 대표하는 철사 조각 시리즈를 돌아본다. 가느다란 철사를 뜨개질처럼 엮어 속이 비치게끔 연출한 작품이다. 전시는 4월 5일부터 9월 2일까지다.
미국 조각가 루스 아사와의 대규모 회고전이 올해 샌프란시스코를 시작으로 미국 전역을 순회한다. 1973년 샌프란시스코 미술관에서 열린 그의 회고전 전시 전경. Photo by Laurence Cuneo. /데이비드 즈워너 홈페이지 캡처세계로 뻗는 한국 작가들
지난해 국내 미술계는 희비가 교차했다. 미술시장은 조정기에 들어섰지만, 그만큼 한국 작가들의 해외 진출이 돋보이기도 한 해였다. 베네치아 비엔날레 기간 중 도시 곳곳에 유영국과 이배 등 한국 작가 10여명의 개인전이 열렸다. 10월 런던 아트 위크 기간에는 이미래와 양혜규 등 국내 작가들을 조명하는 움직임이 돋보이기도 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 미래상 초대 수상작인 김아영 작가의 '딜리버리 댄서의 선:인버스' 전시 전경. 임동률 기자올해 세계무대의 포문을 여는 국내 작가는 김아영(45)이다. 인공지능(AI)과 가상현실(VR) 등을 활용한 미디어아트로 한국 근현대사와 자원 분쟁, 자본과 정보의 이동 등 시대적인 현안을 다뤄온 작가다. 2월 중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에서의 전시를 마치는 그는 첫 독일 미술관 전시에 나선다. 독일 베를린 함부르크 반호프 현대미술관에서의 전시는 2월 28일부터 7월 20일까지.
장르 간 경계를 넘어선 이색 전시들도 눈길을 끈다. 1월부터 프랑스 파리 그랑 팔레는 미술관과 패션쇼 런웨이가 뒤섞인 공간으로 변모했다. 명품의 도시 파리의 중심부를 장악한 건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돌체앤가바나. 브랜드를 설립한 디자이너 도메니코 돌체와 스테파노 가바나의 역작 200점이 1200㎡ 규모 전시장을 메운다.
전시장은 패션과 미술, 공예의 용광로처럼 조성됐다. 프랑스의 화가이자 모델, 배우인 안 두옹(64)은 돌체앤가바나의 최상급 런웨이 쇼인 '알타 모다' 컬렉션에서 영감을 얻은 신작 회화를 걸었다. 베네치아 유리 공예와 시칠리아 세라믹 공예 등 돌체와 가바나가 디자인에 참고했다고 알려진 장인들의 작품도 함께 선보인다. 3월 31일까지.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에서 열리고 있는 'From the Heart to the Hands: Dolce & Gabbana' 전시 전경. /돌체앤가바나 홈페이지 캡처파리에 비견되는 문화 도시 런던은 영화와 미술의 만남을 내걸었다. '디자인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바꾼다'는 취지로 1989년 설립된 런던 디자인 뮤지엄은 영화감독 웨스 앤더슨의 첫 대규모 전시를 앞두고 있다. 1996년 '바틀 로켓'을 시작으로 2023년 '애스터로이드 시티'까지 독보적인 미장센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는 영화감독이다.오는 11월 21일 열리는 이번 전시는 앤더슨의 아카이브를 중심으로 구성될 예정이다. 촬영 과정에서 활용한 수많은 소품과 의상, 스토리보드 등이다. 솜사탕을 연상케 하는 알록달록한 색감이 주요 특징인 감독의 미학을 엿볼 기회다. 마크 제이콥스와 구찌 등 유명 브랜드 디자인에 앤더슨의 미학이 반영되는 과정도 함께 살펴본다. 전시는 내년 5월 4일까지.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에서 열리고 있는 'From the Heart to the Hands: Dolce & Gabbana' 전시 전경. /돌체앤가바나 홈페이지 캡처안시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