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다'는 뜻을 지닌 현악사중주단 '노부스 콰르텟'. 이름따라 간다는 속언 때문일까.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 연주자들이 2007년 결성한 노부스 콰르텟은 글로벌 무대에서 활동하는 한국 현악사중주단 중 첫 세대로 꼽힌다.
과거 한국 클래식 애호가들에게 현악 사중주는 음반으로나 들을 수 있는 장르였다. 솔리스트에 관심이 쏠리는 분위기 탓에 연주자들에게도 현악 사중주를 비롯한 실내악은 그다지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니었다. 이처럼 실내악 불모지(不毛地)였던 한국에서 노부스 콰르텟은 새로운 반향을 일으켰다. 이들은 뮌헨 ARD 콩쿠르 2위, 모차르트 국제콩쿠르 1위 등 최고 권위의 경연 대회를 휩쓸고 유수의 공연장, 페스티벌에서 연주를 이어갔다. 2022/2023년 시즌에는 한국인 최초로 런던 위그모어홀 상주음악가로 활동하며 입지를 다졌다. 클래식 내에서도 어찌보면 대중성과 가장 거리가 먼, 학구적이고 진지한 장르로 취급받는 현악 사중주로 국제적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셈이다. 이는 후배 연주자들에게도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기에 충분했다.남들이 가지않은 길을 택해 클래식계의 '게임 체인저'가 된 노부스 콰르텟, 이들이 앞으로 걸어갈 길이 궁금해졌다. 팀 원년 멤버로 리더를 맡고있는 김재영(바이올린·40)과 팀의 막내 이원해(첼로·34)를 최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만났다.
노부스 콰르텟 프로필 ⓒJino Park▷올해로 창단한 지 18년 차 입니다. 김재영=몇 번의 멤버 교체가 있었지만 지금은 저와 바이올린 김영욱, 비올라 김규현, 첼로 이원해 이렇게 넷 입니다. 원해가 가장 늦게, 5년 전 들어왔죠. 저희는 제1바이올린과 제2바이올린의 구분을 두지 않고 하고 있어요. 이원해=제가 막내인데요, 처음 들어 왔을땐 책임감이 크게 느껴져서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어요. 그래도 체계가 잘 잡혀 있어서 하다가 궁금증이 있을 때 형들이 긁어주듯 솔루션을 줄 때가 있어요.
▷제1바이올린과 제2바이올린을 고정하지 않으면 어떤 장점이 있나요? 김=최근에는 저희처럼 하는 팀들이 늘어나고 있는데요. 현악사중주에서 퍼스트 바이올린의 색채가 크게 드러나다보니 한 사람이 계속하면 그 사람의 특성이 유지 되잖아요. 두 사람이 번갈아서 하면 표현의 틀이 넓어지는 것 같아요. 곡에 따라 더 잘 소화하는 사람이 할 수도 있고요. 연주자 입장에서도 퍼스트랑 세컨의 역할을 둘 다 배울 수 있죠. 부담이 되기도 해요. 누가 퍼스트 하니까 별로더라 이런 말이 나올 수 있잖아요.(웃음)▷2007년 결성됐을땐 세계적인 실내악 단체가 한국에 없었잖아요. 그때와 비교해서 한국 실내악의 위상은 어떻게 달라졌나요 김=지금은 글로벌하게 활동하는 단체들이 꽤 있지만 그때는 국제 콩쿠르를 나가는 콰르텟이 없었어요. 해외 활동은 더욱 없었죠. 그래서 저희는 처음에 모델이 없었어요. 그때만 해도 학교에서 실내악 수업을 하면 지금처럼 공부하고, 탐구하려는 분위기가 적었던 것 같아요. 이=20대에는 솔로 커리어가 중요하잖아요. 실내악은 여러 명이서 그냥 해보는 것 정도로 생각해서 음악적으로 진지하게 대하기는 힘들었죠.
▷실내악은 약간 동아리같은 분위기였던 거네요. 그런 가운데 노부스 콰르텟이 여기까지 온 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원동력이 무엇이었나요. 김=이 장르를 너무 좋아했어요. 사람들과 같이 한다는 것도 좋지만 음악 자체가 좋아서 안할 수 없었어요. 바이올린을 처음할 때 운명적인 걸 느꼈듯 현악 사중주도 제겐 그랬어요. 한번 시작한 이상 제대로 해보고 싶었던 게 여기까지 오게 됐죠. 물론 힘든 시기가 많았어요. 처음 시작할 당시에는 저도 멤버들도 많이 어렸으니까요. 솔로 커리어를 한창 쌓는 시기에 사람들과 함께하는 일을 성숙한 태도로 한다는 게 쉽지 않잖아요. 이제는 일이 명확해지고 틀이 잡혀서 많이 나아졌죠.
▷최근 부상한 아레테 콰르텟 멤버들이 김재영 씨한테 배웠다고 하더라고요. 선배이자 스승으로서 어떤 조언을 해주시는지요. 김=그들은 잘될 수 밖에 없는 팀이에요. 일단 저희의 길을 다 목도했잖아요. 다들 어느정도 나이가 있는 상태에서 시작한 것도 있고요. 음악은 결국 순수한 열정이 있어야 계속 끌고갈 수 있는데 그 팀은 그게 강해요. 제가 주로 조언하는 부분은 인간 관계와 관련한 것들이에요. ▷멤버들 간의 관계를 말하는 건가요? 김=가족끼리는 너무 오래되다보니 눈빛만 봐도 어떤지 알잖아요. 팀원끼리도 그래서 피로해질 수 있어요. 그럴 때 어떻게 잘 넘겨야 하는지 조언하죠. 예민한 부분은 연습할 때 인데요, 내가 수십년 해온 악기를 옆에서 '그거 아니야' 이러면 힘들잖아요. 그런 점에서 늦게 들어온 원해가 힘들었을 거예요. 그런데도 저희 경험을 존중하고 믿고 따라와줘서 고맙죠. 이=저희 팀은 유독 성향이 좀 비슷한 편이에요. 뭔가 선택을 할 때도 크게 다르게 생각하는 지점이 많지 않아요. 그래서 갈등이랄 게 있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최근 몇년간 노부스 콰르텟의 행보는 그야말로 '소처럼 일했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이들은 2020년 멘델스존 현악사중주 전곡 연주를 시작으로 2021년 6월 쇼스타코비치 현악사중주 전곡, 같은 해 8월 브람스 현악 사중주 전곡 연주를 성료했다. 이후에는 베토벤 현악사중주 전곡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오는 3월 8일에는 롯데콘서트홀에서 브람스 현악사중주 전곡 연주을 앞두고 있다. 같은 곡으로 음반 발매도 한다.
2021년 쇼스타코비치 전곡연주 사진. ⓒTaeuk Kang▷이번에 브람스 전곡을 연주와 음반 작업을 하셨어요. 김=브람스의 현악사중주는 특별해요. 브람스는 이 장르에 집착이 커서 정말 완벽하게 만들고 싶었던 것 같아요. 여러 번 곡을 쓰고 폐기하기도 했고요. 그러니 연주하는 입장에서는 너무 고밀도에요. 여기를 살리면 다른 데는 좀 죽이고 이런 게 있어야 하는데 잘 안 돼요. 그렇다고 다 살리면 시끄러워지고요. 연주자들은 딜레마죠. 현악사중주의 끝판왕이라고 하는 베토벤과 비슷하게 어려웠어요. ▷ 멘델스존, 쇼스타코비치, 베토벤 전곡 연주때는 각각 어떤 경험을 하셨나요 이=멘델스존은 들었을때 화려한만큼 기능적으로 어려웠던 것 같아요. 쇼스타코비치는 전곡이 15곡인데, 그때가 코로나였거든요. 작곡가가 살던 시대, 작곡가의 심정이 팬데믹과 맞아 떨어지더군요. 베토벤은 정말이지…. 그때 예술의전당과 영상을 찍는 작업을 연주와 동시에 했는데 체력적으로 힘들었어요. 그가 인고의 아이콘인데, 저희도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더군요. 마지막 연주를 하고 나서도 어떤 큰 산을 넘은 것 같긴한데 성취감보다는 아, 잠시 이 고통을 멈출 수 있다는 생각이…(들었죠).
2022년 베토벤 전곡 연주. 목프로덕션▷그렇게 힘든데도 전곡 연주를 하는 이유가 있나요. 김=말로 설명하긴 힘들어요. 잠깐이지만 그 사람의 인생을 돌아보고 온 것 같달까요. 한 사람의 일대기를 느낀다는 점에서 매료됐죠.
▷작곡가들이 유독 현악사중주 작품에 영혼을 갈아넣은 이유가 뭘까요 이=현악사중주는 작곡가의 일기 같은 거예요. 제 아내가 음악을 잘 모르던 친구인데, 저로 인해 현악사중주를 듣게 됐거든요. 이후에는 다른 클래식도 듣고요. 근데 그 친구가 현악사중주는 '뭔가 굉장히 깊다'고 얘기를 해요. 작곡가가 느낀 개인적인 감정들, 그의 깊숙한 내면이 섬세하게 담겨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2024년 3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브리티쉬 나잇' 무대. ⓒShin-Joong Kim▷그만큼 현악사중주를 연주할 때는 다른 실내악 연주보다 훨씬 예민하고, 민감하겠네요. 이=맞아요. 피아노가 끼면 울림이 전체로 퍼져서 저희가 훨씬 편해지고, 저희끼리 하는 부분 위주로 집중하면 되는데, 현악사중주는 저희 중 누가 조금이라도 안 좋거나 좀 어긋나면 바로 느껴져요.
▷런던 위그모어홀 상주음악가도 하셨잖아요. 이=사실 상주음악가인 줄도 모르고 갔어요. 공연장에 저희 포스터가 있길래 사진을 찍었는데 상주음악가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었죠. 어느 멋진 홀에서 연주를 하더라도 당시에는 긴장이 돼서 무언가를 느끼기는 어려워요. 리허설하고 호텔가서 자고 바로 연주하니까요.
▷유명 공연장에서 많이 연주하셨는데 사운드나 분위기가 기억에 남았던 적은 없나요. 이=소리는 리허설 할 때, 연주할 때 느껴져요. 내고 싶은 소리가 잘 발현이 되는지. 특히 저같은 경우는 베이스 음역인데 첼로 사운드를 잘 받아주는 홀이 있어요. 위그모어홀도 그랬고, 네덜란드의 콘세르트헤바우, 스위스 취리히톤할레 이런 곳들이 좋았어요.
위그모어홀에서 연주 중인 노부스 콰르텟. 목프로덕션▷음악적으로 가장 신경쓰고 추구하는 점은 무엇인가요. 김=넷이서 가장 완전한 밸런스가 나오는 소리가 있어요. 볼륨, 음정, 톤 등 모든 것이 절묘하게 맞았을 때 모두가 느끼는 소리가 있는데 그런 소리를 많이 찾으려고 해요. 그럴때 저희 에너지가 극대화 되고, 그냥 '듣기 좋다' 수준이 아니라 깊숙한 곳을 찌르는 느낌이 들거든요.
▷2027년에 20주년을 맞이해요. 이제는 어느정도 안정기라고 할 수 있을까요. 김=대리, 과장 거쳐서 부장을 달아도 안정감을 느끼진 않잖아요. 지금 위치에서 어떻게 가진걸 유지하고, 새로운걸 확장시킬지 항상 고민이 될 거예요. 저희는 계속 뭔가를 배우고 깨닫고 표현의 틀을 넓혀가야 하고요. 안주하게 되면 거기서 내려가는거죠. 그렇게 40대부터 많이 갈리는 것 같더라고요. ▷앞으로의 목표, 큰 그림이 있나요. 김=적어도 30~40년 가봤으면 좋겠어요. 그 과정에서 음반으로 기록을 지속적으로 남기고 싶어요. 나중에 쌓였을 때 궁금해요. 그리고 유럽 무대에서 지금처럼 활동하는 걸 유지하고 싶어요. 그게 굉장히 힘들거든요. 이=저희를 보고 따라오는 이들도 있을테니까, 그 부분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있어요. 좀 힘들고, 심지어 질릴 지라도, 장기적인 단체로 갔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