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푸는 사우디, 국제표준 이끄는 中…한국 'e스포츠 리더십' 위태 [이주현의 로그인 e스포츠]

사우디아라비아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왼쪽에서 네 번째)가 지난 25일 진행된 e스포츠 월드컵(EWC) 폐막식에서 종합 우승을 차지한 팀 팔콘스에게 트로피를 수여하고 있다. / 사진=사우디 e스포츠 연맹 제공
사우디아라비아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왼쪽에서 네 번째)가 지난 25일 진행된 e스포츠 월드컵(EWC) 폐막식에서 종합 우승을 차지한 팀 팔콘스에게 트로피를 수여하고 있다. / 사진=사우디 e스포츠 연맹 제공
한국은 ‘e스포츠 종주국’으로 불린다. 실제로 e스포츠의 초기 형태인 게임 대회가 처음 개최된 곳은 북미다. 1972년 미국 스탠퍼드 대학생들이 ‘스페이스워’라는 슈팅 게임 대회를 주최한 것이 e스포츠의 기원으로 꼽힌다. 그럼에도 한국이 종주국으로 꼽히는 이유는 e스포츠의 대중화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가 만든 전략 게임인 스타크래프트는 1998년 출시 이후 PC방 확대와 맞물려 국내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이후 PC방 대회를 거쳐 세계 최초로 게임 전문 방송사인 온게임넷과 MBC 게임이 스타크래프트 리그를 중계하기 시작했다. 임요환 등 스타 프로게이머가 등장하며 대중화를 이끌었다. 현재는 리그오브레전드 종목에서 '페이커' 이상혁 등이 활약하고 있다. 이 같은 e스포츠 성장세에 힘입어 한국은 빠르게 e스포츠 종주국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한국의 e스포츠 리더십이 최근 들어 크게 흔들리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중국이 e스포츠 산업에서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우디는 오일 머니를 앞세워 '매머드급' e스포츠 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중국은 텐센트를 앞세워 글로벌 e스포츠 표준 선점에 나섰다.
EWC 공식 SNS 캡처
EWC 공식 SNS 캡처
먼저 사우디는 지난해 ‘e스포츠 월드컵’(이하 EWC)을 개최하며 e스포츠 중심지로 도약에 나섰다. EWC는 사우디가 기존에 진행하던 ‘레인보우 8’을 확대한 행사로 총상금 규모가 약 6000만 달러(약 860억 원) 달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e스포츠 대회다. EWC 연맹에 따르면 8주간 진행된 대회를 보러 200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사우디 수도인 리야드를 방문했다. 또한 5억 명이 넘는 팬들이 2억 5천만 시간 이상 대회를 시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우디는 내년에도 EWC를 개최해 리야드를 ‘e스포츠의 메카’로 성장시킨다는 계획이다. 이와 더불어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협력해 올해부터 e스포츠 올림픽을 개최하기로 했다.

중국은 e스포츠 글로벌 표준 마련을 주도하고 있다. 선봉장은 중국의 국민 메신저인 '위챗'의 모기업인 텐센트다. 텐센트는 적극적인 인수 합병을 통해 ‘리그 오브 레전드’, ‘왕자영요’, ‘전략적 팀 전투(TFT)’, ‘크로스파이어’, ‘배틀그라운드’ 등 주요 e스포츠 종목들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지난 2017년부터 ‘글로벌 e스포츠 서밋(국제 e스포츠 총회)’을 개최하고 있다.

중국은 지난해 1월 국제표준화기구(ISO) 기술위원회에 'e스포츠 표준화 제안서'를 제출했다. 해당 제안서는 작년 5월 TC83 소속 35개국 투표를 거쳐 채택됐고 실무를 맡을 'WG12(Working Group12)'가 만들어졌다. 제안서 작성을 주도하는 WG 12 의장 자리는 중국 몫으로 돌아갔다. 중국이 제출한 표준화 제안서에는 e스포츠의 정의부터 경기 방법, 주최자, 장비 용어까지 광범위한 내용이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ISO는 비정부기구지만 채택된 표준은 대부분 국제 협약을 통해 제도화된다는 점에서 국제적 영향력이 크다.

국제 표준은 국제 대회 경기 규칙이나 대회 운영, 경기장 설계 등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친다.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아시안게임이나 추후 채택 가능성이 있는 올림픽 등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지난 2023년 항저우아시안게임에서는 중국이 정한 장비 규격으로 경기가 진행되면서 한국 국가대표 선수들이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항저우 아시안게임에 출전하는 대한민국 리그오브레전드 국가대표 선수단 (제공=한국e스포츠협회)
지난 항저우아시안게임에서 한국 국가대표 선수단은 금메달 2개,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로 출전 종목에서 모두 입상에 성공하는 성과를 거뒀다. 국내 e스포츠 팀인 T1은 지난 2023년에 이어 2024년까지 2년 연속 리그오브레전드 월드 챔피언십을 제패했다. LoL 월드 챔피언십은 매년 1억 명에 가까운 팬들이 시청하는 LoL e스포츠 최대 규모의 국제 대회다.

이처럼 국제 대회에선 종주국에 걸맞은 성과를 내고 있지만 내실은 불안하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표한 2024 e스포츠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3년 기준 국내 e스포츠 산업 규모는 2569억5000만 원으로 전년 대비 7.8% 성장했다. 하지만 게임단의 수익성은 악화되고 있다. 해당 보고서에 따르면 T1과 디플러스 기아 등 대부분의 게임단이 지속적인 적자 상태다. 또한 종목을 주관하는 종목사의 투자가 줄고 있다. 블리자드엔터테인먼트, 라이엇게임즈 등 글로벌 게임사는 물론 넥슨, 엔소프트 등 국내 업체 역시 e스포츠에 대한 투자를 축소하고 있다.

게임단의 수익성 강화를 위해 콘텐츠진흥원은 '지역연고제 도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보고서에서 콘진원은 "스포츠 비즈니스를 여위하기 위한 기본 요건은 입장권 수익"이라며 프로 야구의 성공 사례를 참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또한 우리나라의 자체 브랜드 e스포츠 종목 강화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현재 한국 팀이 활약하고 있는 리그오브레전드의 경우, 미국 기업이 개발하고 중국이 배급하는 외국 게임이다. 배틀그라운드, 카트라이더, 이터널 리턴 등 국산 게임의 e스포츠 활성화를 위한 지원이 필요한 이유다.

이주현 기자 2Ju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