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급망은 결국 '사람'이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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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선 대형 장거리 화물차 기사의 평균 이직률이 100%에 육박한다. 1년 안에 거의 모든 운전사가 회사를 그만둔다는 얘기다. 이들은 세계 각국으로 수출될 상품을 항만에 제때 하역하기 위해 쉼 없이 차를 몬다. 화물차 기사가 가족과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한 번 길을 나서면 2~3주는 집에 들어가지 못해서다. 햄버거나 부리토로 식사를 때우는 경우가 많아 과체중, 당뇨, 심장질환을 앓는 기사들도 흔하다고 한다.
피터 S. 굿맨 지음
장용원 옮김
트럼프 2기 출범, 공급망 변수
극한의 효율성 추구가 위기 원인
근로자에 대한 정당한 대우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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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용 절감에 매몰된 기업이 충분한 재고를 쌓아두지 않은 것도 발목을 잡았다.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도 재고를 “근본적인 악”으로 규정하며 적기공급생산방식을 고수했다. 이처럼 재고를 최소화해 비용을 줄인 경영인은 고급 요트로 보상받는 반면 혹시 모를 비상상황에 대비해 재고를 넉넉히 확보해둔 경영인은 해고될 위기에 처하는 게 시장의 논리다. 하지만 코로나19 여파로 부품이 하나라도 부족해지면 기업은 생산을 멈추게 되고 공급망은 마비될 수밖에 없다.
“화물차 운전에 따르는 비참한 삶을 감내하려는 사람이 고갈된 것”도 공급망 붕괴를 가속화했다. 한때 화물차 기사는 고된 업무를 충분히 보상해주는 직업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1980년 미국 정부가 화물차 운송업 진입의 문턱을 낮추는 조치를 시행하며 화물 운송업체가 우후죽순 들어섰고 운임료는 급락했다. 2018년 화물차 기사의 중위소득은 규제 완화 이전의 반토막이 됐다. 기사들은 “바퀴 달린 노동 착취 공장”으로 전락한 화물차를 떠났고 공급망도 더욱 취약해졌다. 저자는 공급망의 ‘부품’ 역할에 불과하지만 여전히 ‘사람’으로 남고 싶어하는 화물차 기사들의 일상을 가까이서 조명하며 공급망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한다.이 책은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지난해 11월 이전에 쓰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예고한 10%의 대중국 관세 정책이 공급망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분석을 책에서 찾아볼 순 없다. 하지만 트럼프 1기 당시 관세 정책을 토대로 유추해볼 수 있다. 글로벌 신용평가사 무디스에 따르면 관세 부과로 중국산 제품 가격이 상승하자 이를 수입하는 미국 기업의 경쟁력이 떨어져 2019년 가을까지 미국에서 일자리 30만개가 사라졌다. 많은 기업들은 관세 패널티를 피하기 위해 중국을 떠났지만 베트남, 멕시코 등 다른 지역으로 생산기지를 옮겼을 뿐이었다. 이들 국가 역시 부품이나 소재를 중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저자는 이를 언급하며 “관세가 미국 기업들을 고국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강력한 수단이라는 트럼프의 주장은 헛소리”라고 꼬집는다.
공급망 붕괴에 대응하기 위해선 생산시설을 다변화하는 것을 넘어선 근본적인 처방이 필요하다. 화물차 기사를 비롯해 공급망을 굴러하게 하는 근로자들의 급여를 안정적인 수준으로 보장하는 게 궁극적인 해결 방법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노동의 가치를 떨어뜨리면 노동력 제공을 거부하는 사람이 나타날 리스크에 영원히 노출될 수밖에 없다. 정말로 믿을 수 있는 공급망을 구축하려면 완전히 다른 차원의 변화가 필요하다.” 책의 원제는 ‘세계는 어떻게 모든 것이 부족해졌나(How the World Ran Out of Everything)’다.
허세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