닻 오른 CCS 경쟁 "韓, 철강업 위해 절실…조선엔 먹거리" [김리안의 에네르기파WAR]

지난 17일 글로벌 에너지기업 셸과 에퀴노르 등이 합작해 세운 탄소포집저장(CCS) 기업 노던라이츠의 탄소 운반선 ‘노던 패스파인더’가 연료 주입을 위해 싱가포르 주롱항 케펠 터미널에 기항했다.  셸 제공
지난 17일 글로벌 에너지기업 셸과 에퀴노르 등이 합작해 세운 탄소포집저장(CCS) 기업 노던라이츠의 탄소 운반선 ‘노던 패스파인더’가 연료 주입을 위해 싱가포르 주롱항 케펠 터미널에 기항했다. 셸 제공
지난 17일 찾은 싱가포르 탄중파가항에는 ‘CO2 캐리어’라고 쓰인 대형 선박이 정박해 있었다. 글로벌 에너지 기업 셸과 에퀴노르, 토탈에너지가 합작해 만든 CCS 기업 노던라이츠가 소유한 세계 최초 상업용 크기(길이 130m)의 탄소 운반선 노던 패스파인더다. 겉으로 보기엔 일반 배와 다를 바 없지만, 노던 패스파인더의 갑판 밑에는 3750t짜리 액화 탄소 저장 탱크 2개가 설치돼 있다. 영하 30도의 극저온을 통해 액체화한 탄소를 가둬두는 공간이다.

잉그바르 벤모 선장은 선박 후미에서 바다로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물을 가리키면서는 “탱크의 온도를 낮추는 데 쓰이는 냉각수”라고 설명했다. 이어 “탄소를 안정적으로 액화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탱크의 압력은 최대 19바로 높일 수 있고, 평소엔 12바 정도로 관리되고 있다”고 했다.

탄소 운반선, 탄소포집 핵심 밸류체인

텡 후아 리 셸 해양운영 아태·중동 총괄
텡 후아 리 셸 해양운영 아태·중동 총괄
갑판에는 연료 탱크와 함께 풍력 추진용 로터세일(원통형 돛)이 세워져 있었다. 노던 패스파인더는 로터세일과 공기윤활 시스템 등을 통해 연료 효율성을 약 9% 개선했다. 셸의 텡 후아 리 해양운영 아태·중동 총괄(사진)은 “노던 패스파인더가 CCS 서비스를 제공하는 선박이기 때문에 더욱 친환경적으로 운항하기 위해 로터세일 등을 설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탄소 운반선은 글로벌 탄소포집저장(CCS) 시대의 운명을 쥔 핵심 밸류체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CCS는 석유가스 등 화석연료를 태우는 과정에서 배출되는 탄소를 포집한 뒤 폐유·가스전을 저장소로 활용해 영구적으로 매립하는 사업이다. 2019년 국제해사기구(IMO)가 탄소의 국경 간 이동 및 해외 저장을 허용한 뒤 CCS 밸류체인은 글로벌 규모로 급성장하고 있다.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전 세계가 2050년까지 연간 최소 6기가톤(Gt)의 탄소를 포집 및 저장해야 탄소중립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선박 중개업체 클락슨은 이 중 20%가량이 해상 운송으로 이뤄질 것으로 예측했다. 전 세계적으로 탄소 운반선은 작년 9월 기준 4척(노던라이츠 선박들까지 포함하면 6척)에 불과했으나, IEA 분석에 따르면 2050년까지 2500척 가량의 탄소 운반선이 필요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탄소 운반선은 특히 아태 지역 CCS 사업에서 중요하다. 탄소 배출국과 탄소 저장국 간 미스매치 때문이다. 한국, 일본, 싱가포르 등은 탄소 배출량에 비해 저장소가 충분하지 않은 반면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호주 등은 유·가스전이 많아 탄소 저장소 후보지가 많다. 셸의 자린 자파렐 모하마드 CCS 아태 총괄은 이날 기자 간담회에서 아시아 지도를 가리키며 “탄소 운반선이 더 먼 국가 간 탄소 이동 서비스 확장의 가능성을 열어줬다”고 말했다.

텡 후아 리 총괄은 "한국 조선·해운사들은 LNG선박 같은 극저온 화물선 분야에서 이미 독보적인 기술력을 가진 선도 기업들로서 빠르게 성장하는 CCS 시장에서 분명 새로운 기회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탄소포집 밸류체인 선점 나선 각국 정부

탄소 운반선뿐 아니다. 세계 각국은 CCS 밸류체인 전반을 선점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CCS는 에너지 안보와 경제성을 위해 화석연료를 계속 사용하면서도 동시에 탄소중립을 달성해나갈 수 있는 기술이라는 점에서다. 탄소 운반선 건조를 비롯해 포집시설과 수출 터미널, 저장소 건설 등도 CCS 관련 신사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유럽연합(EU)은 기후기술 지원을 위해 조성한 30억유로 규모의 이노베이션 펀드 중 3분의1을 CCS 프로젝트에 배정했다. 노르웨이 정부는 자국 시멘트 기업의 탄소 포집 시설 건설을 위해 들어가는 비용 4억유로의 85%를 대주기도 했다. 미국은 CCS 밸류체인 사업자들에 탄소 1t당 85달러에 달하는 세액공제 지원을 해주고 있다. 시장조사기업 MMR에 따르면 2023년 125억7000만달러이던 전 세계 CCS 시장 규모는 2030년 542억7000만달러로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자린 자파렐 모하마드 셸 CCS 아태 총괄
자린 자파렐 모하마드 총괄(사진)은 “CCS 사업에는 정부의 지원뿐만 아니라 기업 간 크로스보더(cross-border) 협력이 필수적”이라고 했다. 대규모 사업의 불확실성과 막대한 투자 비용을 분담하기 위해서다. 그는 이어 “대(對)유럽 수출이 많은 한국 기업들은 내년부터 본격 시행되는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에 바로 노출되게 된다”며 “한국 정부가 전방위적인 지원과 더불어 탄소 수출 터미널 지정 등 다음 단계의 정책 결정을 빨리 내려줘야 유럽 시장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이 한시름 놓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울산, 여수 등을 탄소 수출 허브로 지정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제3의 중국 침공 막아야”

국내에서는 CCS에다 탄소를 활용(utilization)하는 기술까지 더한 CCUS법이 내달 7일 발효된다. 또 국내 최초의 탄소 저장소가 될 가능성이 높은 동해 가스전(탄소 저장 용량 120만t) 실증사업은 지난해 초 예비타당성 조사 대상에 선정된 뒤 1차 사전점검회의를 앞두고 있다. 연안에서 탄소를 묻을 수 있는 대염수층을 탐사하는 작업도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지형상 적합한 저장소를 찾아내는 게 쉽지 않기 때문에 해외로 탄소를 수출하는 인프라 개발을 병행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업계에서는 중국 기업들의 아태 지역 CCS 시장 잠식에 대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해상풍력, 태양광 분야에서 저렴한 중국산 제품이 전 세계 공급망을 지배한 것과 같은 현상이 재현되어서는 안된다는 우려다. 국내 기업들의 탄소 포집 기술력은 미국·유럽 등의 세계 최고 기술력 대비 약 80% 수준으로 평가되고 있다. 중국의 경우 국내 기업과 비슷한 기술력에다 가격 경쟁력까지 갖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탄소 배출을 줄여야하는 기업들의 경제성을 확보하기 위해 국내 저장소를 최대 발굴해 운반 비용을 절약해야 한다”며 “또한 동시에 탄소 포집 기술부터 해외 저장소로 운반하는 전 과정에서 국내 기업들이 관련 인프라를 공급해 실적을 쌓고 국내 CCS 산업이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싱가포르=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