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성공 신화의 배경엔 증오와 복수심이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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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 대륙다들 전쟁이 끝난 줄 알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럽은 반세기 넘게 평화의 시대를 누렸다. 국제연합(UN)의 등장과 마셜 플랜을 비롯한 재건 정책은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땅에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는 듯했다. 역사가들은 베를린 장벽 붕괴와 라인강의 기적 등 재건과 부흥의 서사에서 유럽을 바라봤다.
키스 로 지음
노만수 옮김/글항아리
640쪽│3만8000원
과연 그럴까. 최근 번역된 <야만 대륙>은 "전쟁 직후 유럽이 열어젖힌 서사는 재건과 부흥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무정부 상태로 전락한 역사"라고 반박한다. 영국의 역사학자 키스 로가 '선진 대륙' 유럽의 야만적인 민낯을 640쪽에 걸쳐 고발한다. 책은 2012년 펜 헤셀-틸먼상과 이탈리아 내셔널 체라스코 역사상 등 국제 출판상을 휩쓸었다. 지금까지 22개 언어로 번역 출간됐다.

전쟁의 상실은 '부재'로 이어졌다. 전쟁고아들은 부모를 잃었고, 수많은 결혼 적령기의 청춘이 짝을 잃었다. 사회 제도가 마비된 상태에서 매춘과 강간, 절도 등 도덕의 부재도 만연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상처는 증오와 복수심의 굴레로 이어졌다.
정치인들은 복수심을 교묘하게 활용했다. 유럽에 만연했던 분노의 분위기는 혁명을 부추기기에 완벽한 환경이었다. 공산주의는 독일인과 파시스트, 부역자를 향한 적개심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저자는 "훗날 세계대전이 점차 냉전으로 변화하자 이러한 증오는 미국과 자본주의, 서구를 향한 혐오로 쉽게 전환됐다"고 분석한다.
패전국 독일이 겪은 피해도 균형 있게 다뤘다는 점이 흥미롭다. 유대인 홀로코스트 등 나치의 만행을 주로 조명한 이 시기 다른 역사서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1944년 독일 도시 네메르스도르프가 겪은 수모가 한 가지 예다. 스위스의 한 특파원은 "인간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가장 야만적인 광경이었다"고 보도했다.
저자는 "유럽 성공 신화의 배경에는 전쟁으로 인한 증오와 복수심이 깔려있다"며 "오늘날까지 개개인과 공동체, 모든 민족이 복수로 인한 쓰라린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는 국면에 곱씹어볼 만한 말이다.
안시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