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보다 어린 남자와 재혼"…누구도 막지 못한 그녀 정체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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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마르트의 여인'
수잔 발라동(1865~1938)
어머니의 사랑으로 시작해
날것의 삶을 그리다

1909년 어느 여름날 밤, 프랑스 파리 근교의 커다란 저택 앞. 대문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나온 중년 여성은 낯선 청년과 마주쳤습니다. 청년의 옆에는 그녀의 아들이 술에 만취해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저는 아드님 친구인데요, 술을 마시고 너무 취해서 제가 데려왔습니다.” “참, 매번 이게 뭐 하는 짓인지…. 고마워요. 다음에 밥이나 한 번 먹으러 와요.”어머니와 아들의 친구가 한 번쯤 나눌 법한 평범한 대화. 그런데 둘 사이의 분위기가 왠지 이상했습니다. 그녀가 아들을 부축해 들어간 뒤에도, 청년은 닫힌 대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청년은 훗날 회고했습니다. “내가 꿈꾸던 여인을 만났다”라고요. 가슴이 뛰었던 건 그녀도 마찬가지. 그녀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를 만나고 두 번째 청춘이 찾아왔다.”
그녀의 이름은 수잔 발라동(1865~1938). 나이는 44세였습니다. 반면 청년 앙드레 우터(1886~1948)는 고작 23세로, 발라동보다 스물한 살이나 어렸습니다. 심지어 그는 발라동의 아들보다도 세 살 아래였습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사랑은 세계 예술계에 하나의 혁명을 일으키게 됩니다. ‘몽마르트르의 여인’으로 불렸던 화가 수잔 발라동의 예술과 파란만장한 삶, 그리고 사랑 이야기.
어머니라는 이름
‘아버지: 없음.’1865년 9월 제출된 발라동의 출생증명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그 시절 가난한 프랑스 시골 마을에서 이런 기록은 ‘사형 선고’로 받아들여지곤 했습니다. 태어난 아기 100명 중 4명이 버려지던, 먹고 살기 힘든 시대. 아버지가 버린 아이를 홀로 맡아 키우는 어머니는 극히 드물었습니다.발라동의 어머니 마들렌은 달랐습니다. 그녀는 남자 복이 없었습니다. 스물일곱에 첫 남편을 잃고 아이 하나를 키우던 그녀는 철도를 놓으러 마을에 온 기술자와 사랑에 빠졌지만, 그는 배 속의 아기만 남겨둔 채 떠나버렸습니다. 마들렌의 친척들은 넌지시 말했습니다. “아기를 포기해. 지금 키우고 있는 아이라도 잘 키워야 하지 않겠니.” 그녀가 가난한 ‘싱글맘’ 세탁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들렌에게는 책임감과 대범함, 그리고 자신의 아이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이 있었습니다.
장점은 한 가지 더 있었습니다. 이곳은 모네와 마네 등 인상주의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예술가가 모여드는 ‘예술의 성지’였습니다. “엄마, 저거 봐!” 다섯 살배기 발라동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 옆에 앉아 그들의 붓질을 한참 바라보곤 했습니다. 거리에서 주운 연필과 숯 조각으로 이리저리 그림을 그려 보기도 했습니다. 아이를 두고 일을 나가야 하는 마들렌의 무거운 마음도, 발라동이 그림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조금이나마 가벼워졌습니다. 그렇게 몽마르트르의 거리는 마들렌과 함께 발라동을 키웠습니다.
예술을 사랑하다
발라동은 어머니의 성격을 쏙 빼닮았습니다. 그녀는 에너지가 넘쳤고, 겁이 없었고, 고집이 셌습니다. 몽마르트르의 주민들은 날랜 몸놀림으로 거리를 쏘다니며 위험한 장난을 치는 발라동을 ‘몽마르트르의 작은 공포’라고 불렀습니다.급기야 말괄량이 발라동은 학교에서도 퇴학당하고 맙니다. 마들렌이 없는 살림을 쥐어짜 보낸 학교였습니다. 마들렌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너는 나처럼 되지 않았으면 했는데….” 어린 시절의 마들렌이 그랬고 다른 몽마르트르의 아이들이 그렇듯이, 학교에서 쫓겨난 발라동이 갈 곳은 푼돈을 받는 일자리뿐이었거든요.
행복도 잠시. 어느 날 리허설 도중 그녀는 발을 헛디뎌 공중에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입은 허리 부상으로 그녀는 더 이상 서커스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다치지 않았으면 나는 아마 평생 서커스를 했을 거야.” 훗날 발라동은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고는 발라동을 미술로 이끌게 된 운명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허리를 다쳐 누워 있는 동안 발라동은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생각했습니다. ‘그림 모델을 하면 돈을 괜찮게 번다던데, 한번 해 볼까?’ 화가가 되고 싶어서는 아니었습니다. 겁 없고 고집 센 발라동조차 감히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하층민 여성이 화가가 된다는 건 유례가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모델, 화가가 되다
모델 일은 발라동의 생각보다 더 잘 풀렸습니다. 화가에게 선택받으려면 젊고 아름다워야 했고, 지시에 맞춰 하나의 자세를 몇 시간이고 취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아름다운 외모와 함께 서커스로 단련된 체력을 갖춘 그녀에게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얼마 안 돼 발라동의 아름다움과 모델로서의 재능은 파리 미술계에 널리 알려졌습니다.파리 미술계의 거물인 샤반느의 그림에서 그녀는 예술의 여신으로 등장했습니다. 보이테크 하이나이스의 그림에서는 진실의 여신이 되었고, 구스타프 베르트하이머의 그림에서는 세이렌이 되었지요. 르누아르의 걸작 ‘부지발의 춤’에서는 무도회의 생동감 넘치는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발라동은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았고, 때로는 그들과 연인 관계로 발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미술 재능을 처음 제대로 알아본 사람은 연인이었던 ‘몽마르트르의 작은 거인’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신체적 장애를 타고난 로트레크는 다른 사람들의 편견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부터 다른 사람에게 편견을 갖지 않기로 했습니다. 발라동이 스물두 살이던 1887년, 우연히 그녀의 그림을 봤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른 평범한 화가들과 달리 ‘여자가 그린 그림’에 선입견이 없었던 그는 솔직담백한 평가를 내놨습니다. “이거 정말 대단한데! 에드가 드가가 이걸 봐야겠어.”
얼마 뒤, 발라동은 자신이 그린 그림을 들고 로트레크와 함께 드가의 앞에 섰습니다. 자신감 넘치는 발라동도 이날만큼은 바짝 긴장해 얼어 있었습니다. 드가는 발라동이 가장 존경하는 거장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냉소적이었고, 평소 여성들을 무시하는 언행을 할 때가 많았고, 다른 사람의 그림, 특히 제대로 기초를 교육받지 않은 사람의 그림을 아주 가혹하게 비판하기로 유명했습니다. “그래요. 그림을 한 번 줘 보세요.” 아무런 표정도 없이 무미건조하게 말하는 드가에게, 발라동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그림을 건넸습니다.
그 말대로였습니다. 화가로서 발라동의 커리어는 이후 날아올랐습니다. 발라동의 재능을 높게 산 드가는 그녀의 그림 선생님이자 홍보대사를 자처했습니다. 화가 최고의 영예인 ‘프랑스 국립미술협회 전시회’(Salon de la Societe Nationale des Beaux-Arts)에 발라동이 여성 화가 중 역대 최초로 그림을 출품할 수 있게 도운 것도 드가였습니다. 하층민 출신의 여성 화가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위대한 성취였습니다. 드가는 그렇게, 발라동에게 ‘그림을 그리는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알려준 스승이었습니다.
발라동의 그림에는 이상한 매력과 독창성이 있습니다. 드가를 비롯한 당시 사람들이 충격까지 받았을 정도로요. 이유는 이렇습니다. 발라동이 등장하기 전까지 여성은 그저 남성에게 ‘보여지고 그려지는’ 대상이었습니다. 남성 화가들은 제멋대로 자신의 취향에 맞춰 그림을 그리곤 했습니다. 똑같은 모델을 그려도 풍만한 몸매를 좋아하는 화가는 풍만하게, 날씬한 몸매를 좋아하는 화가는 날씬하게 그리는 식이었습니다. 오랫동안 화가들의 모델로 일하며 발라동은 그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제멋대로 그녀
이런 솔직함은 발라동의 삶 자체를 닮아 있었습니다. 그녀는 제멋대로였습니다. 감정에 휘둘렸고, 내키는 대로 행동했으며, 연애도 마구 했습니다. 하지만 발라동은 언제나 진심을 다했고, 자신의 선택에는 반드시 책임을 졌습니다. 1883년, 열여덟 살의 발라동이 임신 사실을 알게 됐을 때도 그랬습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는 질문에 발라동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녀 자신도 몰랐을지 모릅니다.이런 발라동도 슬럼프에 빠질 때가 있었습니다. 서른네 살이던 1896년, 자신을 8년이나 쫓아다니던 부유한 은행가 폴 무시스와 결혼한 뒤였습니다. 아이가 있었지만 여전히 발라동에게 구애하는 매력적인 남자는 수없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발라동은 무시스를 택했습니다. 그간 고생한 어머니를 편히 모시고 아들을 잘 키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발라동이 마흔네 살이 되던 1909년. 그녀는 우연히 만나게 된 아들의 친구 우터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우터는 젊고 매력적일 뿐더러 발라동의 예술을 깊이 이해했고, 그녀의 재능을 숭배했습니다. 그런 우터와 만나며 발라동의 창작열은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아챈 무시스는 당연히 분노했고, 이혼을 요구했습니다. 지은 죄가 명백한 만큼 발라동은 모든 것을 무시스가 원하는 대로 처리했습니다.
1920년대, 50대에 접어들며 발라동은 마침내 자신이 꿈꾸던 것들을 이뤘습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했고, 그림으로 세상과 소통했으며, 경제적 자유도 얻었습니다. 그림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습니다. 성(城)을 사고 호화로운 파티를 열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몽마르트르의 작은 식당들을 즐겨 찾았고, 점원이 감동해 울음을 터뜨릴 만큼 후한 팁을 남기곤 했습니다.
마들렌처럼 발라동도 자신만의 길을 뚜벅뚜벅 걸었습니다. 붓을 든 채 쓰러져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를 기리는 기념 동전에는 세 단어가 새겨졌습니다. ‘주고, 사랑하고, 그리다(Donner, Aimer, Peindre)’. 그리고 그 세 단어는 다시 한번 이어지게 됩니다. 몽마르트르가 낳은 또 다른 화가. 발라동에게 커다란 고통만큼이나 큰 행복을 안겨준, 그녀의 아들 모리스 위트릴로의 이야기로요.
*다음 주 위트릴로 편(후편)으로 이어집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 담당 기자가 미술사의 거장들과 고고학, 역사 등을 심도 있게 조명하는 연재물입니다. 매주 토요일 새로운 이야기로 찾아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미술 소식과 지금 열리는 전시에 대한 평가, 심층 분석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 구독 중인 6만여명의 독자와 함께 아름다운 작품과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앞서 다뤘던 화가들의 이야기와 아름다운 그림들은 두 권의 책 <명화의 탄생, 그때 그 사람>과 <명화의 발견, 그때 그 사람>을 통해 곁에 두고 즐길 수도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