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금괴 대이동, 50년 만에 재현…트럼프의 화폐개혁 구상은 [한상춘의 국제경제 읽기]

뉴욕 거래소 金 재고
3000만 트로이온스
트럼프 당선 후 불어나

런던은 金 부족 현상
선물·현물 가격차 영향

화폐개혁 논의 주시해야
세계 금괴가 영국 런던시장에서 미국 뉴욕시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최근 뉴욕상품거래소(COMEX)에 보관 중인 실물 금괴 재고량이 3000만 트로이온스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도널드 트럼프 후보의 미국 대통령 당선 확정 이후 3개월도 안 되는 기간에 무려 1220만 트로이온스가 들어왔다. 1972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금태환 정지’ 선언 이후 가장 빠른 유입 속도라는 평가가 나온다. 개인 금 보유분까지 포함하면 뉴욕시장에 쌓인 금괴는 사상 최대 규모로 추정된다.세계 금괴 대이동에 따라 런던시장은 금 부족 현상에 시달리고 있다. 영국은행(BOE)에서 금을 찾으려면 평소 1주일이면 가능했는데, 이제 두 달을 기다려야 할 정도다. 미국 중앙은행(Fed), 유럽중앙은행(ECB)과 함께 세계 3대 중앙은행인 영국은행에서 좀처럼 볼 수 없던 마진콜(증거금 부족) 현상이다. 그동안 달러화의 힘을 빼려고 금 보유량을 크게 늘려온 중국 등 다른 국가가 금괴 옮기기에 동참할지에도 큰 관심이 쏠린다.

무려 50년 만에 벌어지는 금괴 대이동의 직접적 원인은 금 현물과 선물 간 가격 차이 확대다. 국제 금시장에서 런던은 현물 거래가 중심인 반면 뉴욕은 선물 거래가 많이 이뤄진다. 지난달 20일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뉴욕 금 선물 시세는 런던 현물 시세보다 하루 평균 1.5% 정도 높은 콘탱고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례적’이란 평가가 나올 정도로 활발한 런던과 뉴욕시장 간 차익거래(arbitrage)의 촉매는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정책이다. ‘모든 수입품에 10∼20%의 보편관세를 부과하겠다’는 공약 이행에 대비해 금괴를 미리 미국으로 옮기려는 움직임이 가격에 영향을 주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뉴욕시장에 금괴가 쌓이면서 금 본위제로의 화폐개혁 논의도 고개를 들고 있다는 점이다. 금 본위제 부활은 미국 공화당이 궁지에 몰릴 때마다 위기 타개책으로 제시하는 단골 메뉴다. 달러와 금의 태환을 보장하던 브레턴우즈 체제 시절 공화당의 전통인 ‘강한 미국(Strong America)’이 가장 잘 유지됐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72년 금태환 정지, 1976년 킹스턴 회담 같은 위기에도 잘 버티던 달러 중심의 미국 질서가 처음 크게 흔들린 게 2차 오일 쇼크 이후다. 사상 초유의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에 직면한 Fed가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대폭 올리자 일본 엔화를 중심으로 ‘강한 달러·약한 아시아 통화’ 구도가 형성됐다. 예기치 못한 강달러로 대일 무역적자가 용인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자 재정적자마저 심해지며 미국은 디폴트 우려에 휩싸였다. 당시 크게 당황한 로널드 레이건 정부는 금 본위제 부활 방안까지 검토했으나 결국은 선진국 간 엔화 대비 달러 약세를 유도하기로 하는 ‘플라자 합의’로 발등의 불을 껐다.

달러 중심의 미국 질서가 또 한 차례 균열을 보인 계기는 1995년 4월에 맺은 역(逆) 플라자 합의다. 추세적으로 최근까지 지속돼온 이 합의는 ‘강한 달러-약한 아시아 통화’ 구도를 만들면서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의 무역수지 흑자를 크게 키웠다.

국민 경제 3면 등가 법칙(X-M=S-I, X: 수출, M: 수입, S: 저축, I: 투자)에 따라 아시아 국가의 과잉 저축분은 미국 자산시장으로 흘러 들어간다. 또 거품 붕괴 모형에 따라 자산가격을 떠받칠 돈이 더 이상 흘러들지 못하면 붕괴를 맞는다. 리먼브러더스 사태는 달러 중심의 미국 질서가 ‘루비콘강을 건넜다’는 극단적인 비관론을 낳기도 했다.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처음 치러진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밋 롬니 공화당 후보는 달러 중심의 미국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금 본위제 부활을 공론화했다. 당시 롬니 후보에게 힘을 실어준 대표적인 인물이 트럼프 대통령이다. 트럼프 집권 이후 금 본위제 부활을 포함한 화폐개혁 주장이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금 본위제 부활 논의는 그 자체만으로 외화 보유, 재테크 선택 등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각국 중앙은행이 금 본위제 부활에 대비해 금 확보에 나서면 금값이 크게 오른다. 금 본위제 부활 논의가 가장 활발했던 2011년 한국은행은 외화 보유 다변화 차원에서 무려 96t의 금을 사들였다.

금 본위제가 부활하기 위한 가장 큰 전제 조건은 충분한 금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50년 만의 대이동으로 뉴욕에 금괴가 쌓이는 현상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 힘든 것도 이 때문이다. 커다란 변화를 몰고 올 수 있는 뉴노멀의 가능성을 예의주시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