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의 빛, 미국으로 건너가다…'우스터 걸작전' 한국서 열린다

Cover Story

우스터 걸작전, 15일부터 더현대서울에서

물은 파란색, 수련은 흰색, 그 잎은 초록색이다. 클로드 모네가 ‘수련’ 연작을 그리기 전까지 사람들은 그렇게만 알고 있었다. 수련을 본 이들은 비로소 깨달았다. 아침 햇살을 받은 보랏빛 연못 위 연보라색 수련은 정오의 태양 아래에서 에메랄드빛 연못과 크림색 수련으로 보이고, 해 질 녘에는 춤추는 주황빛과 분홍빛으로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을.
클로드 모네, <수련>, 1908년, 캔버스에 유채, 94.8X89.9cm 우스터미술관
클로드 모네, <수련>, 1908년, 캔버스에 유채, 94.8X89.9cm 우스터미술관
인상주의가 등장하기 전 화가들은 그림에 색(色)을 쓸 때 엄격한 규칙을 지켜야 했다. 고상한 품격을 의미하는 어두운 갈색을 주로 써야 했고, 원색은 도덕·순결 등을 표현할 때만 제한적으로 허용됐다. 주제도 정해져 있었다. 신화와 종교, 역사 등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것들을 다룬 그림만이 가치 있다고 여겨졌다. 그렇지 않은 작품은 전시를 거부당해 세상의 빛을 볼 수조차 없었다.

모네를 비롯한 인상주의자들은 여기에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고리타분한 규칙과 주제, 편견을 내다 버리고 밖으로 나가 살아 숨 쉬는 세상을 두 눈으로 마주했다. 그리고 빛과 공기의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 바뀌는 그 풍경을 원색의 그림에 담아냈다.

사람들의 첫 반응은 싸늘했다. 151년 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첫 번째 인상주의 전시회는 조롱거리였다. 모네는 “벽지 모양보다 수준 낮은 그림”, 카미유 피사로는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풍경”이라는 비난을 들었다.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인물화에는 “썩어가는 시체 같다”, 세잔의 그림에는 “정신병자의 환각 상태에서 나온 작품”이라는 폭언이 쏟아졌다.

가난과 비웃음에 시달리면서도 인상주의 화가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사람들은 인상주의자처럼 세상의 색을 보는 데 점차 익숙해졌고, 일순간 사라지는 빛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인상주의의 빛은 프랑스를 넘어 유럽의 다른 지역으로, 영국을 거쳐 대서양 건너 미국으로 퍼져나갔다.

오는 15일 서울 여의도 더현대서울 ALT.1에서 개막하는 인상파 특별전 ‘모네에서 미국으로: 빛, 바다를 건너다’는 그 과정에서 나온 걸작들을 소개하는 전시다. 화집과 디지털 이미지로만 보던 모네의 수련, 르누아르가 포착한 빛나는 순간, 공기 흐름이 스민 피사로의 풍경화가 모두 한국에 모였다.

물빛은 햇살에 춤추는데,
왜 파란색만 그려야하나

미술에 관심이 없어도 인상주의라는 말을 한 번쯤 들어본 사람이 많다. 그만큼 인상주의는 대중의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어려운 미술사 지식을 몰라도 화사한 색채와 경쾌한 붓터치에서 직관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인상주의를 처음 접한 19세기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너무 새로운 화풍에 당황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빛의 아름다움’에 푹 빠지게 됐다. 화가들도 그랬다. 너나 할 것 없이 인상주의를 배워 자신의 화풍에 접목했고, 그렇게 인상주의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서울 여의도 더현대서울 ALT.1에서 오는 15일 개막하는 ‘인상파, 모네에서 미국으로: 빛, 바다를 건너다’ 특별전에서는 클로드 모네, 존 싱어 사전트, 폴 세잔 등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들의 작품을 통해 그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인상주의, 확산하다
알프레드 시슬레, <빨래터>, 1876년, 캔버스에 유채, 38.4X55.2cm, 우스터미술관
카미유 피사로, <디에프의 듀케인 분지와 베리니 분지, 흐린 날씨> 1902년, 캔버스에 유채, 52.1X64.8cm 우스터미술관
인상주의는 하루아침에 태어나지 않았다. 모네 이전에도 고리타분한 전통에서 벗어나 혁신을 추구한 선배 작가들이 있었다. 전시 1부는 장바티스트 카미유 코로와 귀스타브 쿠르베 등 인상주의 탄생 직전 활동한 대가들의 작품으로 시작한다. 코로는 부드럽고 자유로운 붓질을 통해 안개가 낀 듯한 공기 표현과 빛의 효과를 강조했고, 쿠르베는 역사와 종교 대신 일상을 주제로 그림을 그려 인상주의 탄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

1874년 인상주의 화가들의 첫 번째 전시가 열리면서 마침내 ‘인상주의’라는 용어가 탄생했다. 2부에서는 인상주의가 꽃피우는 과정에서 나온 걸작을 만날 수 있다. 모네의 ‘수련’은 인상주의의 정수를 보여주는 걸작. 국내에서 수련 원화 전시는 2022년 국립중앙박물관 이건희컬렉션 전시 이후 3년 만이다. 카미유 피사로와 알프레드 시슬레 등 다른 인상주의 대표 화가들의 작품도 함께 전시장에 나와 있다.

1880년대부터 인상주의는 점차 프랑스 파리를 넘어 세계로 퍼져나간다. 미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작가들이 파리에서 인상주의를 배워 갔기 때문이다. 3~4부에 나온 작품들은 그 결과물이다. 존 싱어 사전트는 인상주의적 기법을 자신만의 세련된 스타일로 발전시켰다. 제임스 맥닐 휘슬러의 스케치도 전시장에 한 점 나와 있다. 1890년대부터는 미국에서 인상주의를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작가가 생겨났다. ‘미국의 모네’로 불리는 차일드 하삼이 뉴욕을 비롯한 현대 미국의 빛과 색채를 생생하게 그려낸 게 단적인 예다.

얼리버드 티켓 이틀 만에 완판
폴 세잔, <카드놀이하는 사람들 습작>, 1890-1892년, 캔버스에 유채, 32.1X35.2cm 우스터미술관
폴 시냐크, <골프 주앙>, 1896년, 캔버스에 유채, 65.4X81.3cm 우스터미술관
전시의 마지막인 5~6부에서는 인상주의에서 한발 더 나아가 새로운 예술을 추구한 거장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세잔의 ‘카드놀이하는 사람들’ 습작은 인상주의에서 현대미술로 나아가는 과도기를, 폴 시냐크의 ‘골프 주앙’은 점묘법의 태동을 볼 수 있는 그림이다. 이런 작품들에는 단순한 미술계의 유행 변화를 넘어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시대상도 반영돼 있다. 산업화와 도시화, 과학 발전 등 시대의 격렬한 변화가 인간의 정신에 미친 영향이 이들 천재 예술가의 작품에 녹아 있는 것이다.

유럽과 미국에서 활약한 인상주의 거장 39명의 원화 걸작 53점이 걸리는 이번 전시는 개막 전부터 화제를 모으고 있다. 지난달 17일에는 전시를 정가보다 40% 저렴하게 관람할 수 있는 얼리버드 티켓이 판매 개시 이틀 만에 모두 팔려나가기도 했다. 티켓 정가는 성인 기준 2만원, 청소년은 1만5000원. 전시는 5월 26일까지다.

100년 전 모네 알아봐…
1억에 산 '수련', 현재 수백억대 거래

우스터미술관 전경.
우스터미술관(사진)은 클로드 모네가 그린 ‘수련’의 가치를 미국 최초로 알아본 미술관이다.

‘인상파, 모네에서 미국으로: 빛, 바다를 건너다’ 특별전에 나온 1908년 작 수련은 우스터미술관이 1910년 구입한 작품이다. 당시에도 수련은 개인 수집가에게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미술관들은 좀처럼 작품을 사지 않았다. 작품을 혹평하는 비평가가 적잖았기에 시간이 흘러 작품의 가치가 입증됐을 때 사도 늦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이때 우스터미술관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1910년 미국 미술관 최초로 수련을 구입한 것. 필립 J 젠트너 당시 우스터미술관장이 1910년 6월 21일 파리의 뒤랑 뤼엘 갤러리에 보낸 전보 기록에는 긴박했던 상황이 그대로 반영돼 있다. “미술관 이사회가 구입을 승인했습니다. 이사회에 실제 작품을 보여주기도 전에 구매가 결정된 건 이례적인 일입니다.” 당시 구매 가격은 3500프랑(현재 가치 약 9400만원). 현재 비슷한 연작은 수백억원대에 거래된다. 우스터미술관의 과감한 투자가 빛을 본 것이다.
당시 모네가 거래하던 화랑인 뒤랑-뤼엘과 우스터미술관이 주고받은 전보.
우스터미술관은 1898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우스터시에 들어선 미술관이다. 변호사이자 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으로 활동한 스티븐 솔즈베리 3세(1835~1905)가 세웠다. 적극적인 수집으로 고대부터 동시대 미술까지 시대와 지역을 망라하는 4만여 점의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다.

지금도 우스터미술관은 인상주의 작품과 이에 영향을 받은 미국 화가들의 작품 컬렉션을 늘려가고 있다. 클레어 휘트너 큐레이터는 “우스터미술관은 파리에서 태어난 인상주의가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로 퍼져나간 과정을 가장 잘 보여주는 미술관 중 하나”라고 소개했다.

파리 '인상'에 취한 그들
아메리카에 빛을 뿌리다

미국의 인상주의 화가 5인

지금 세계 미술의 중심인 미국도 한때 미술계에서 촌구석 취급을 받았다. 19세기까지만 해도 미국 화가 중 큰 뜻을 품은 이들은 수준 높은 미술을 배우기 위해 프랑스 파리나 그 중간 다리인 영국 런던에 다녀오는 게 보통이었다. 파리나 런던에 거주하며 활동하는 화가도 있었다. 이런 노력은 수십 년이 흐른 뒤 미국 뉴욕이 ‘세계 미술 수도’로 등극하는 밑거름이 됐다. 미국인으로 태어나 인상주의가 보여주는 빛의 아름다움에 푹 빠진 화가 다섯 명의 이야기.
메리 카사트, <벌거벗은 아기를 안고 있는 렌 르페브르(어머니와 아이)>, 1902-1903년, 캔버스에 유채, 68.1X57.3cm 우스터미술관
메리 카사트(1844~1926)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부잣집에서 태어난 메리 카사트는 어릴 때부터 유럽 여행으로 문화적 소양을 쌓으며 화가의 꿈을 키웠다. 1866년 스물두 살 때 제대로 미술 공부를 하기 위해 홀로 파리로 떠났다. 이곳에서 카사트는 에드가르 드가(1834~1917)를 만나 인상파 화가들의 모임에 합류한다. 카사트의 그림에는 당시 남성 화가들이 잘 다루지 않던 여성의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표현이 녹아 있다. 이번 전시에 나오는 ‘벌거벗은 아기를 안고 있는 렌 르페브르’가 단적인 예다. 미국의 부유한 지인들에게 인상파를 소개해 미국 내 인상파 확산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윈슬로 호머, <겨울의 해안>, 1892년, 캔버스에 유채, 72.4X122.6cm 우스터미술관
윈슬로 호머(1836~1910)

출신지만 미국일 뿐 파리 인상주의자인 카사트와 달리, 토종 미국 화가인 윈슬로 호머는 인상주의를 받아들이면서도 미국적 특성을 살려 독자적 화풍을 확립했다. 보스턴 근교에서 태어난 그는 남북전쟁 때 전쟁 특파원 겸 삽화가로 활약하는 등 미국에서 주로 활동했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은 정확한 관찰력과 역동적인 표현. 이를 바탕으로 미국의 대자연과 인간의 대결을 그린 걸작 풍경화들을 남겼다. 전시작인 ‘겨울의 해안’도 차가운 겨울 바다의 강력한 힘과 자연의 웅장함을 극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존 헨리 트와츠먼, <폭포>, 1890년경, 캔버스에 유채, 76.2X76.5cm 우스터미술관
존 헨리 트와츠먼(1853~1902)

신시내티 출신인 존 헨리 트와츠먼은 1870~1880년대 독일 뮌헨과 파리에서 공부하며 인상주의를 접했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와 부드럽고 섬세한 색조로 고향의 자연과 계절의 변화를 포착했다. 격렬한 자연현상을 서정적으로 표현한 게 트와츠먼 화풍의 특징이다. 전시작인 ‘폭포’와 ‘옐로우스톤의 급류’ 등에서 특유의 미묘한 색조 변화, 안개가 낀 듯한 공기 표현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조용하고 내향적인 성격인 그는 풍경화에 빛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시(詩)적인 심상을 함께 담으려 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트와츠먼의 작품은 현대적인 추상성을 선구적으로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마흔아홉 살의 이른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트와츠먼의 작품은 동시대 화가들에게 ‘미국적인 주제의 아름다움’을 일깨웠다.
존 싱어 사전트, <캐서린 체이스 프랫>, 1890년, 캔버스에 유채, 68.1X57.3cm 우스터미술관
존 싱어 사전트(1856~1925)

‘화가들의 화가.’ 존 싱어 사전트와 함께 활동한 화가들은 그를 이렇게 불렀다. 다른 화가들도 참조할 만큼 사전트의 그림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에 거주하던 미국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사전트는 평생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작품 활동을 한 ‘코스모폴리탄’이었다. 미국에서도 자주 전시회를 여는 등 유럽과 미국 예술계의 가교 역할을 했는데, 1903년 미국 대통령이던 시어도어 루스벨트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완벽한 데생력과 인상주의적 붓 터치를 조화시킨 그의 작품은 여러 미국 화가에게 모범이 됐다. 이번 전시작인 ‘물을 나르는 베네치아 여인’에서는 일상을 포착하는 그의 능력을, ‘코르푸 섬의 오렌지’에서는 특유의 빛나는 색채감으로 묘사한 풍경을, 초상화 ‘캐서린 체이스 프랫’에서는 사전트의 트레이드마크인 흰색 표현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
차일드 하삼, <프랑스 정원에서 꽃 따기>, 1888년, 캔버스에 유채, 71.1X55.1cm 우스터미술관
차일드 하삼(1859~1935)

처음 목판화가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차일드 하삼은 1886년 파리 유학 중 접한 인상주의에 깊은 영감을 받아 인상주의 화가가 됐다. 그리고 미국으로 돌아와 평생 3000점에 이르는 작품을 성실히 제작했다. 이렇게 거둔 상업적·예술적 성공 덕분에 ‘미국의 모네’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는 인상주의 화풍을 충실히 따랐다. 하삼의 작품에서는 밝고 경쾌한 색채, 빠르고 자유로운 붓 터치로 포착한 대기와 빛의 효과가 두드러진다. 하지만 주제는 철저히 미국적이었다. 전시작인 ‘비오는 콜럼버스 애비뉴’는 현대 미국의 도시(보스턴) 풍경을, ‘브렉퍼스트 룸, 겨울 아침, 뉴욕’은 미국 가정의 실내 풍경을 다룬 작품이다. 그의 아름다운 작품들은 19세기 말~20세기 초 미국이 어떻게 인상주의를 ‘미국화’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