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도 불렀던 '해뜰날'…송대관, 서민 애환 달랜 희망의 가수

송대관, 7일 심장마비로 별세
서민 애환 달래고 희망 노래한 '국민 가수'
'해뜰날', 故 정주영 회장 애창곡이기도
사진=뉴스1
"꿈을 안고 왔단다. 내가 왔단다 / 슬픔도 괴로움도 모두 모두 비켜라 / 안 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 / 쨍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

'해뜰날'로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던 가수 송대관이 7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79세.

송대관 측에 따르면 고인은 이날 오전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최근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병원에서 치료받던 중이었으며, 기저질환이나 지병은 없었다고 관계자는 전했다.

1946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난 송대관은 1967년 '인정 많은 아저씨'로 가요계에 데뷔했다. 가수의 꿈을 품고 상경할 당시 기차표를 살 돈이 없어 무임승차를 할 정도로 삶이 녹록지 않았다. 데뷔를 한 뒤로도 10년의 긴 무명이 이어졌다. 돈벌이가 넉넉하지 않은 그를 대신해 만삭의 아내가 생계를 꾸리기도 했다.

가수 인생에 볕이 들기 시작한 건 1975년 '해뜰날'이 대히트에 성공하면서였다. '해뜰날'의 희망찬 가사처럼 송대관은 이 곡으로 가수왕까지 석권하며 무명의 설움을 단번에 씻어냈다.

하지만 '해뜰날'의 영광도 잠시 곧바로 위기가 찾아왔다. 가수들의 주요 수입원이던 극장 쇼가 사양길로 접어들자 송대관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고, 긴 공백을 가졌다.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건 1989년이었다. '정때문에'를 발표하며 재기에 성공한 그는 이후 '차표 한장', '유행가', '네박자' 등을 잇달아 성공시키며 태진아, 현철, 설운도와 함께 트로트 4대 천왕으로 불렸다.

'차표 한장'이 히트에 성공하자 과거 무임승차 기억을 떠올려 서울역에 몇 배로 차비를 돌려줬다는 사연도 유명하다.
가수 송대관 /사진=연합뉴스
송대관은 서민적이고 친근한 노래로 따뜻함을 안긴 대표적인 가수였다. 자수성가한 그였기에 '해뜰날'의 가사는 오랜 시간 많은 이들의 마음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그중에는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도 있었다. 강원도 산골 빈농의 가정에서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정 회장 역시 소를 판 돈 70원을 들고 가출해 세계 굴지의 기업을 일궈낸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그는 생전 직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의 애창곡인 '해뜰날'을 자주 불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성서 대중음악 평론가는 "'해뜰날'이 발표될 당시 우리나라 대표적인 슬로건이 '하면 된다'였듯, 1970년대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경제 개발 시대에 이 곡은 마치 주제가처럼 불렸다"고 짚었다. 이어 "'쨍'이라는 단어가 크게 유행했던 것만큼이나 많은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시대의 응원가였다"고 덧붙였다.

트로트 외길을 걸어온 고인은 꾸준히 쌓아온 음악적 성취로 2001년 옥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2008~2010년에는 대한가수협회장을 맡아 가수들의 권익 보호에 앞장섰다. 그는 회장으로 재임할 당시 2009년 일본 노래방에서 한국 가요가 무단으로 사용된 점을 지적하며 현지 법원에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내기도 했다.

고인은 최근까지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왔다. 지난해 11월 7일 정규 앨범 '지갑이 형님'을 발매했고, 지난달 19일 '전국노래자랑'에 출연했다. 오는 16일 방송분인 충남 당진시 편과 3월 2일 영등포구 편도 초대 가수로 녹화를 마쳤다. 다음 주 '가요무대' 출연도 예정돼 있었으나, 며칠 전 컨디션 난조로 출연을 미뤄야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오는 9일 오전 11시이며, 장지는 서울추모공원이다.

김수영 한경닷컴 기자 swimming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