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키 17', 소모품이 된 인간에게, 미키가 띄우는 작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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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미키 17' 들고 온 봉준호 감독 인터뷰
"영화는 미키만 죽음 내몰지만
현실은 '김군'이 사고 당하면
'박군' '최군'이 빈자리 채우고
사회 시스템은 그대로 굴러가
이런 절망감 극복하고 싶었다"


‘미키 17’은 에드워드 애슈턴의 소설 <미키 7>을 원작으로 한다. 우주 식민지 개척이 시작된 205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서 주인공 미키(로버트 패틴슨 분)는 방사선 피폭 같은 위험한 임무에 투입됐다가 죽으면 생체 프린팅으로 무한정 되살아나는 ‘익스펜더블’(expendable·소모품)을 자원한 인물이다. 임무 수행 중 17번째 미키가 죽은 줄 착각한 연구진이 18번째 미키를 출력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에선 죽음을 불사해야 하는 모든 위험한 일을 한 명에게 반복시키지만 실제론 김군이 사라지면 다음엔 박군, 최군이 그 자리를 채우잖아요. 이런 암울한 상황을 압축하는 단어가 바로 영화 속 익스펜더블입니다. ‘내가 일하다 죽어도 다음에 누군가 또 올 거고, 그 외엔 어떤 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절망감을 영화에서 극복해내고 싶었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은 미키지만, 현실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은 독재자 마셜(마크 러펄로 분)이다. 앞서 영국 런던과 독일 베를린에서 영화가 공개된 뒤 평단에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떠오른다는 의견이 있었고, 국내에선 윤석열 대통령을 연상시킨다는 평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세상을 구하는 ‘헐크’로 잘 알려진 마크 러펄로의 첫 악역 연기에선 봉 감독 특유의 ‘삐딱한 휴머니티’가 명징하게 드러난다. 봉 감독은 “성격이 이상해서 사람을 볼 때도 자꾸 다르게 보는 집착이 생긴다”며 “역사 속 독재자들을 보면 대중을 휘어잡는 위험한 매력에 애교도 있기 마련인데, 러펄로가 잘 표현해줄 거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마셜은 역사상 존재했던 끔찍한 독재자, 나쁜 정치인 모습을 큰 용광로에 섞어낸 인물이죠. 특정인을 저격할 의도는 전혀 없었는데, 각 나라의 정치 상황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 또한 영화적 재미라고 생각해요.”
원작과 달리 영화에서 독재자 부부 캐릭터를 등장시킨 데 대해선 “필리핀의 마르코스 부부,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부부 사례를 참고했다”며 “더 무섭기도 하고, 웃기기도 할 것 같아 추가로 설정한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오는 28일 국내 정식 개봉을 앞둔 ‘미키 17’은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 비경쟁 부문인 스페셜 갈라에 초청됐다. 당초 영화제 측에서 경쟁 부문을 제안했지만 봉 감독은 이를 사양하고 비경쟁 부문에 출품했다. 상을 탈 기회를 스스로 고사했다는 얘기다. 그는 “운이 좋았던 것일 수 있지만 사실 수상에 대해선 더 바랄 게 없다”며 “경쟁 부문에선 다른 작품이 한 번 더 기회를 얻을 수 있게 하고, 우린 비경쟁 부문에서 즐겁고 편하게 영화를 보여주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2019), 아카데미영화제 4관왕(2020)을 안겨준 영화 ‘기생충’ 이후 신작을 내는 데 부담감은 없었냐는 질문에 그는 “전혀 없었다”고 답했다.
“쿠엔틴 타란티노 형님이 황금종려상 등을 받은 나이가 30대였는데 제게 그런 사건이 벌어졌을 때는 이미 50대에 접어든 후였거든요. 굉장히 흥분되고 영광스러운 일이었지만 한 발짝 떨어져서 비교적 침착하게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었죠. 오스카 레이스 이후 6주 정도 쉬고 또다시 영화를 준비해 왔어서 중압감을 고민할 시간도 없었고요. 그저 계속 일할 뿐이죠(웃음).”
봉준호표 ‘땀내 나는 SF 영화’는 어떻게 감상해야 할까. 봉 감독은 “영화관에서 보지 않는다면 후회할 것”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SF 영화다운 스펙터클한 장면이 등장하지만, 배우들의 섬세하고 풍부한 연기를 커다란 스크린으로 볼 때 오는 감동도 있어요. 어떤 작품이 스크린에 걸리길 기다리며 설레어하고, 개봉하면 달려가는 일련의 과정이 시네마가 가진 소중한 매력이 아닐까요.”
김수현/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