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히 열려있는 포디움처럼 세상을 변화시키는 작은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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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현호의 바벨의 도서관아버지의 미음과 아들의 리을
항상 견뎌주고 품어주는 그것은...
40여 년째 붓글씨를 쓰고 계신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레 다양한 서체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한글 서예의 기본인 궁체부터 판본체, 흘림체의 글자를 보며 때로는 그 구조적 아름다움에 심취하기도 했습니다. 같은 글자라고 하더라도 자음과 모음의 배치, 받침과의 관계에 따라 그 모습이 매우 달라지기 때문인데요. 붓글씨의 특성상 글자는 대개 자음의 ‘머리’부터 완성되어 가는데, 저는 어쩐지 화룡점정(畫龍點睛)처럼 붓을 꾹 눌렀다가 뗄 때 완성되는 ‘받침’에 유난히 매력을 느꼈습니다.
비록 붓글씨는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글씨체도 늘 힘이 넘쳤습니다. 마치 초대형 붓으로 현판을 쓰는 서예가의 글씨처럼 기운이 가득했죠. 그중에서도 단 한두 개의 획으로 완성해내는 ‘미음(ㅁ)’은 듬직하기까지 했습니다.
부모님의 글씨를 동경했던 까닭에 저도 아주 오랫동안 연필과 만년필로 썼고 그 습관과 관심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서걱서걱 소리를 내는 수동 연필깎이를 돌리며 하는 고민이란 보통 ‘리을(ㄹ)’과 ‘미음(ㅁ)’ 받침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관한 것이죠. 특히 ‘리을(ㄹ)’만큼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정성을 들여 씁니다. 종종 저의 ‘리을(ㄹ)’은 아버지의 ‘미음(ㅁ)’처럼 탑의 기단부를 닮아 글자를 단단하게 지탱하는 듯 보였습니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한글은 구조적으로 참 아름답습니다.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의 위대함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직관적인 조형미에 감탄할 것입니다. 자음과 모음의 조합으로 우리말을 표기할 수 있다는 사실도 근사하지만, ‘받침’이 있다는 점이 참 놀랍습니다. 한글을 천천히 쓰거나 읽어볼 때면, 안정적인 구조의 건축물 하나가 눈앞에 나타난 것처럼 느껴집니다. 한글의 ‘받침’은 꼭 건축물이나 탑의 기단부인 포디움(podium)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어려서 탑의 층수를 헤아리는 법을 배울 때마다, 기단부는 제외해야 한다고 들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런데 층수에서 제외하는 일은 기단부가 덜 중요하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기단부야말로 수천 년 동안 탑을 지켜온 하부구조입니다. 억겁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굳건하게 살아남은 한반도의 탑에는 반드시 한글 받침처럼 든든하게 탑신부를 받드는 기단부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내고 버텨낸 기단부를 칭찬해줘야 할 것 같습니다. 탑의 기단부를 건축물로 확장하면 그것이 바로 포디움입니다.
도심 속 건축물의 기단부를 칭하는 포디움은 보행자를 품어줍니다. 서울의 청계천변이나 테헤란로의 수많은 사무용 건축물은 최근 10년 사이에 이 포디움을 새롭게 갖췄습니다. 원래 건물의 저층부에는 기껏해야 층별 안내표가 놓여 있거나 번쩍거리는 대리석으로 마감된 로비(응접 공간)를 갖추는 경우가 더 잦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극심한 번화가 속에 위치한 건축물들도 보행자를 품기 위한 변화를 시작했습니다. 원래 포디움이 없었던 건축물도 새 단장을 통해 모습을 바꿀 정도이니까요. 오랫동안 닫혀 있었던 건축의 저층부는 이제 보행자들이 마음껏 드나들 수 있는 장소로 변신했습니다.

모든 변화의 가능성을 담은 열린 공간으로서 탈영토화된 곳을 말하죠. 정주(定住)적 공간이 아닌 포디움은 잠시 머물 수 있고, 확장이 가능한 유목적 공간이라는 측면에서 ‘매끈한 공간’으로 분류될 수 있을 듯싶습니다. 포디움이 한글 받침처럼 든든한 이유도 바로 그 포용하는 특성 때문이 아닐까요?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도심 속 건축과 토목처럼 제도화·영토화·구획화된 장소를 한결같이 ‘홈 패인 공간’으로 분류하면서도 ‘매끈한 공간’과 상호작용하는 가변적 특성도 함께 설명했습니다)
음표로 쌓은 탑
악보를 읽다가 보면 여러 개의 음을 쌓아놓은 것처럼 한꺼번에 연주해야만 되는 구간이 나옵니다. 물결처럼 생긴 이 기호를 ‘층거리꾸밈음(아르페지오)’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보통은 제일 아래에 표시된 음부터 가장 위의 음까지 ‘드르륵’ 긁듯이 연주하라는 악상 기호입니다. 전문 연주자는 물론 피아노를 향한 관심이 높은 사람들은 줄곧 이러한 연주기법을 따르곤 하는데요. 근사하게 ‘드르륵’ 소리를 내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드르륵 긁어 소리를 내는 ‘글리산도’가 규칙적인 간격으로 촘촘하게 쌓은 탑이라면 ‘층거리꾸밈음’은 석공이 개성을 한껏 강조해 쌓은 석탑처럼 매력적입니다.
충분한 연습 끝에, 필요한 지점마다 탑의 기단부를 쌓듯 배치된 층거리꾸밈음을 잘 짚어낸다면, 연주는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층거리꾸밈음에서도 역시 위로 쌓은 음들을 듬직하게 받쳐주는 첫 음이 참 중요한가 봅니다.
[사카모토 류이치 - Energy Flow]
포디움 같은 사람
사찰이나 절터(寺地), 박물관에 들를 때마다 탑의 기단부에 마음을 빼앗기곤 합니다. 탑신부에 비해 풍화가 더 진행된 경우가 많아 패이거나 깨지기가 일쑤이고 이끼와 지의류(地衣類)가 잔뜩 낀 모습이 측은함을 자아내기 때문이죠. 그래도 듬직하게 버텨내는 느낌이 참 좋습니다. 항상 견뎌내고 품어주는 기단부에 마음을 투영하게 될 정도입니다.
영화나 문학에서도 꼭 그런 인물에게 유난히 감정이입을 하게 되는데요. 한글의 받침, 건축의 포디움, 악보의 층거리꾸밈음 같은 그런 사람 말입니다. 올봄에는 더 정성 들여 쓴 ‘리을(ㄹ)’과 ‘미음(ㅁ)’처럼, 탑의 받침이나 포디움처럼 버텨내고 수용하는 마음을 길러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