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흔적을 남기는 생명...상처입은 자는 나무에 매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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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재현의 탐나는 책지난해 본 영화 중 나에게 가장 깊이 각인된 작품은 무엇일까 고민하다 <퍼펙트 데이즈>로 정했다. 우연히 집에서 다시 보는 동안 크게 감명하고 만 것이다.
영화 주인공이 읽는
고다 아야의
"인간에게 저마다의 이력이 있듯
나무에도 저마다의 이력이 있다"
화장실 청소부인 히라야마는 어느 변기 칸에서 한 남자아이를 발견한다. 사정은 모르지만 그 안에서 울고 있었던 듯하다. 시무룩해 하는 아이의 손을 잡고 나오던 그는 곧 아이의 엄마와 마주친다. 내내 찾고 있었던 듯 아이의 이름을 외치며 다가온 엄마는 아이를 붙잡고 잠시 그를 확인하고는, 물티슈를 꺼내 아이의 손을 닦고 그 자리를 떠난다.
여기까지 봤을 때, 이 영화가 벌써 별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도 모르고 특정 계층을 대표할 작중의 누군가를 쉽게 악인으로 만드는 듯해서. 그런데 엄마의 손을 붙잡고 걸어가던 아이가 짧게 뒤를 돌아보더니 히라야마에게 손 인사를 하고 그 순간 그는 활짝 웃는데, 그 웃음이 내 이런저런 계산을 단번에 씻겨줄 정도로 해맑아서 마음이 확 풀렸다.

이 영화의 인상적인 부분은 주인공인 히라야마가 대체로 말이 없다는 점이다. 아예 말이 등장하지 않는 다큐멘터리나 예술영화 종류는 아니라서 주변 인물들이 일상의 인사와 대화를 건네지만, 그는 대체로 말이 없다. 입 밖으로는 말을 하지 않는 대신 독백으로 갈음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독백도 하지 않는다.
때로 말이 너무 많은 것이 도리어 피로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행동에 나서지 않고 너무 많은 사변에 골몰하며 카메라 혹은 종이 앞에 자신의 이야기를 드러내기를 꿈꾸는 ‘문제적 주인공’ 대신, 대다수의 사람이 그렇듯 말없이 소임을 해내는 것이 더 소중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히라야마가 눈여겨 읽는 책이 자연스레 궁금해졌다. 윌리엄 포크너의 『야생 종려나무』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11』, 그리고 고다 아야의 산문집 『나무』. 아직 만나기 쉽지 않은 앞의 두 권 대신 『나무』를 출퇴근길 버스에서 펼치고 잠들기 전에도 읽었다.

“아버지는 똑똑한 언니를 몹시 흡족해하며 이것저것 더 가르쳐주려고 했다. 언니는 아버지의 말을 이해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언니는 언제나 아버지와 함께 걸어갔지만 나는 늘 뒤에 남겨졌다. 하지만 별도리 없으니 홀로 뒤따라갔다. 질투가 낳은 쓸쓸함이 있었다. 한쪽은 선천적으로 총명하다는 타고난 소질이 있는 데다 가르쳐주는 사람을 흡족하게 하면서 자신도 즐겁고 화기애애한 상태에서 발전해간다. 그에 반해 다른 한쪽은 멍청하다는 부담이 있는 데다 가르쳐주는 사람을 한숨짓게 하면서 자신도 즐기지 못하고 질투를 맛본다. 그야말로 비극적인 전개다.”
『나무』의 첫 부분엔 어린 고다 아야보다 나무에 더 능통해 아버지의 이쁨을 받았던 언니가 등장한다. 고다 아야가 “초목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에 환경이나 부모님보다 “언니를 향한 질투”가 있었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예능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 속 자연인들에게 각자 나름의 사연이 있었던 것처럼, 나무에 빠져들게 되었다는 것은 인간들 사이에서 모종의 상처를 입었거나 비뚤어짐이 있었다는 말과 같지 않을까.
그러나 고다 아야에 따르면 나무는 인간과 다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 저마다의 이력이 있듯이 나무에도 저마다의 이력이 있다. 나무는 몸에 자신의 이력을 표시해서 보여준다. 몇 살인지, 별 근심 없이 오늘날까지 살아왔는지, 아니면 고통을 견디며 인내해왔는지, 행복하다면 행복했던 이유가 있을 터이고 고통을 겪었다면 몇 살 때, 몇 번, 어떤 종류의 장애를 만났는지 등을 자신의 몸에 전부 기록한다.”
우수하기만 한 것 같은 편백나무에도 나름의 결점과 애로사항이 있다는 말을 듣고, 괜히 치올랐던 질투를 잠재우고 안타까움을 느끼는 그녀의 감상이 풉 소리를 내며 웃게 했다. 묘포장의 사람들이 삼나무의 잎이 세 개가 아니라 네 개인 묘목을 돌연변이나 종이 다르다고 하는 대신 “애교 있는 녀석”이라고 말할 때도 같은 소리가 나왔다.
반면 시대에 따라 나무에 대한 애호가 달라지면서 어떤 말들이 사라지는 것을 깨닫고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말이다. 잔소리쟁이 할멈이라고 미움받아도 상관없다. 나 혼자만이라도 그 말을 사방에 널리 퍼뜨려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회고하는 장면에서는 뜬금없이 편집자의 자세도 똑같지 않을까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영영 돌아오지 않을 여행을 떠나려는 게 아니라면, 이러한 뜻을 품기만 한 채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를 위해서라도 좋은 것을 찾아내고 잘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 것이 더 좋겠다 싶었다. <퍼펙트 데이즈>라는 영화도 결국엔 저쪽의 히라야마와 이쪽의 누군가가 상상일지언정 접촉했기에 그의 이야기를 알 수 있었던 셈이니까. 『나무』 외에도 우리에게 조금씩 다가오고 있을 『야생 종려나무』와 『11』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게 된다.
이재현 문학동네 국내문학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