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채 시장에서 입지 좁아지는 국민연금

회사채 시장 주도권 쥔 증권사
연금의 시장왜곡 우려 압박 무시

국민연금, 회사채 투자비중 축소
금융채·여전채 등으로 눈 돌려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 사옥.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 사옥.
회사채 시장에서 국민연금의 입지가 급격히 위축되고 있다. 국민연금이 회사채 투자 규모를 줄이고, 참여에도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시장에서의 영향력이 크게 약화된 점이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회사채 투자자의 입장을 대변할 창구가 사라지면서 회사채 투자 전반이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직접 나서서 증권사 압박까지 했지만

3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회사채 수요예측 제도의 왜곡 문제를 인지하고 지난해 증권사들에 이에 대한 우려를 전달했다. 당시 국민연금은 증권 계열사인 보험사와 자산운용사 등의 회사채 인수 물량이 과도하게 많아, 회사채 금리가 시장금리보다 지나치게 낮게 형성돼 투자자 입장에서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증권사들이 여기에 별다른 반응을 내놓지 않으면서 실질적인 변화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대형 자산운용사 등 다른 기관투자자들도 계열사를 동원하는 증권사의 회사채 입찰방식에 불만이 크지만 문제는 개선되지 않고 있다. 이들 증권사 계열사의 회사채 수요예측 참여 물량이 전체의 80%를 차지할 만큼 확대돼 국민연금과 자산운용사의 눈치를 볼 필요성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증권사 영업 관행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 증권사에 압박 조치를 가한 사례가 종종 있었다. 작년 대형 A증권사가 HD현대마린솔루션의 기업공개(IPO) 주관사 선정 경쟁 프레젠테이션에서 자사의 애널리스트가 국민연금 운용역으로 이직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홍보한 것이 대표적이다. ‘조단위’ IPO 기업은 국민연금과 같은 대형 기관의 자금을 유치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자사 출신 직원이 도와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를 인지한 국민연금은 지난해 12월 국내 주식 거래증권사에서 A증권사를 제외했다. 국민연금의 거래 중단 조치는 해당 증권사에 상당한 수수료 손실을 초래했다.

회사채 발행금리 왜곡과 관련해서도 국민연금측은 이같은 제재 사례를 언급하며 증권사들을 압박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회사채 시장 영향력 갈수록 줄어

하지만 증권사들은 여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국민연금의 영향력이 주식시장과 달리 회사채 시장에서는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다. 증권사들이 자체 자금과 계열사 자금만으로도 회사채 수요예측 물량을 채울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다.

이런 가운데 국민연금은 회사채 투자 비중도 줄이고 있다. 국민연금은 오는 2029년 말까지 국내 채권 비중을 현재 29.2%에서 20.5%로 10%포인트 축소할 계획이다.

국민연금의 투자 스타일과 현재 회사채 시장 분위기 간 간극도 크다. 국민연금은 회사채 수요예측에 참여하더라도 예상 체결 금리 대비 0.01%(10bp) 이상 높은 금리를 제시한 경우가 많아 주관 증권사및 발행사와의 협상에서 의견 차이가 발생하고 있다.

이에 따라 국민연금은 회사채보다 오히려 은행과 금융기관이 발행하는 금융채 및 카드사, 캐피탈사가 발행하는 여전채(여신전문금융회사채) 등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금융채와 여전채는 회사채와 달리 수요예측 과정을 거치지 않고, 증권사와 직접 금리를 상의한 후 발행 날짜까지 정할 수 있어 보다 유리한 투자 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국민연금은 최근에 회사채보다 금융채와 여전채 위주로 투자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배정철 기자 bj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