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고를 타고 노는 아이가 남긴 서정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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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기태의 처음 책 이야기시인으로, 수필가로, 번역가로 다채롭되 세속에 물들지 않은 글을 남긴 작가
피천득 시집, 금아시선(琴兒詩選), 일조각, 1980년 4월 10일 발행
금아(琴兒) 피천득(皮千得, 1910~2007)을 기억하노라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작품이 있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다녀오려 한다. 소양강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로 마무리되는 ‘인연’이라는 제목의 수필이 그것이다.
국어 교과서에 실린 이 작품을 읽고 자란 세대라면 절대 못 잊을, 설렘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간직한 첫사랑에 대한 절절한 표현을 담은 작품이다. 또, “수필은 청자(靑瓷) 연적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속으로 난 평탄하고 조용한 길이다.”로 시작하는, 수필 형식으로 쓴 수필론이라고 할 수도 있는 '수필'이란 작품 또한 '인연'과 함께 피천득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피천득은 일상의 평범한 소재를 서정적이고 섬세하면서도 간결한 문체로 풀어낸 우리 수필 문학계의 대표 작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수필가의 면모는 피천득 문학세계의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실제로 그가 문학세계에 처음 이름을 올린 것은 수필이 아니라 시를 통해서였다. 1930년 <신동아>에 시 ‘서정소곡(抒情小曲)’으로 등단한 뒤 잡지 <동광>에 시 ‘소곡(小曲)’(1932), 수필 ‘눈보라 치는 밤의 추억’(1933) 등을 발표했다. 1947년 첫 시집 『서정시집』을 출간한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오늘날 대다수 사람에게 각인된 것처럼 우리나라 대표 수필가로서의 자리를 굳게 차지할 정도로 수필 문학의 진가를 발휘했다.

1910년 음력 4월에 서울에서 태어나 97세를 일기로 2007년 5월 세상을 떠난 피천득은 구한말 거상(巨商)이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 밑에서 유복하게 성장했다. 7세 때 유치원에 입학했지만 동시에 서당에서 한문 공부도 함께 했다고 한다. 서울고보 부속소학교를 마친 후 2년을 월반하여 1923년에 현재 경기고등학교의 전신 서울 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나이가 13세였는데 그 무렵 일본인 영어 교사를 통해 영시(英詩)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부모님을 일찍 여의는 바람에 이러저러한 곡절 끝에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이었던 춘원 이광수의 집에 살게 되었다. ‘금아(琴兒)’라는 아호는 피천득이 마치 “거문고를 타며 노는, 해맑은 아이를 닮았다”고 해서 춘원이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한편, 집안 사정 때문에 고보를 졸업하지 못하고 춘원의 조언에 따라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이 유학길에 올랐던 일본이 아닌 중국으로 떠나 상하이(上海)에 있는 토마스 한베리 공립학교(Thomas Hanbury Public School)에 다녔다. 그런데 이 학교는 모든 과목을 오직 영어로만 가르쳤다고 한다. 이후 피천득 선생은 호강대학교(University of Shanghai) 영문과를 졸업하게 된다. 광복 직후에는 경성대 예과 교수를 거쳐 1974년까지 서울대 사범대학 교수로 재직했고, 1954년에는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하버드대에서 1년간 영문학을 연구하기도 했다.
‘거문고를 타며 노는, 어린아이처럼 맑은 이’가 남긴 서정시편
이번에 소개할 『금아시선』은 초판 1쇄가 1980년 4월 10일 출판사 일조각(一潮閣)에서 발행된 시집으로, 피천득 선생의 새로운 작품들을 모은 것은 아니다. 다음과 같이 앞붙이로 달려 있는 ‘신판을 내면서’라는 짧은 글을 보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산호와 진주』 속에 같이 들어 있던 시와 수필을 따로 내게 되었다. 집은 달라졌어도 이웃에서 살 것이다. // 나는 아름다움에서 오는 기쁨을 위하여 가끔 글을 써 왔다. 그리고 그 기쁨을 나누기 위하여 발표하였다. 시나 수필이나 다 나의 어쩌다 오는 복된 시간의 열매들이다.
1946년부터 서울대학교에서 영미시(英美詩)를 강의하기 시작한 피천득 선생은 또한 시집으로 『서정시집』(1947)과 『금아시문선』(1959)을 간행하는 한편, 1969년에 문집으로 『산호(珊瑚)와 진주(眞珠)』를 간행했다. 그의 작품세계는 “일체의 사상이나 관념을 배제한 순수한 서정을 기반으로 시정(詩情)이 넘치는 아름다운 정조와 생활을 노래했다.”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특히 『산호와 진주』에는 그리움을 꿈으로 승화시킨 「꿈」이나 「편지」, 소박하면서도 전통적인 삶의 서정으로 노래한 「사랑」 및 순수한 동심과 자연을 기조로 한 작품(시와 수필)이 상당수 실려 있다. 그중에서 수필은 『금아문선』으로, 시는 『금아시선』으로 각각 따로 묶어 1980년에 다시 펴낸 것이다.
먼저 이 시집의 판형은 가로 132mm, 세로 195mm 크기의 사륙판이며, 제책 형식은 우철(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페이지를 넘기면서 책을 읽는 방식) 형식의 양장 표지(하드커버)에 재킷이 씌워져 있다. 좀 더 자세히 보면 양장 표지에는 종이 재질로 겉면이 발라져 있고(일명 ‘싸바리’), 책등은 모서리가 각진 모등으로 마감되어 있다.
김기승(1909~2000)은 그의 아호를 딴 ‘원곡체’로 유명한 서예가다. 원곡 선생은 최초로 『한국서예사』를 집필했으며, 서예가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문화로 거듭나기 위해 묵영(墨映; 먹의 색을 다섯 단계로 나눠 표현하는 기법), 책의 제자(題字; 서적의 머리나 족자·비석 따위에 쓴 글자), 컴퓨터 서체(폰트) 등을 통해 서예의 새로운 경지를 모색하는 일에 앞장섰다. 실제로 그의 서체가 책 표지, 비문, 현판, 간판 등에 가장 많이 쓰임으로써 생활 및 실용 서예 분야 발전에 큰 업적을 남긴 서예가로 평가되고 있다.
하드커버 표지를 넘기면 레자크 계열의 면지(面紙)가 표지와 본문을 연결해 주고 있으며, 면지를 넘기면 얇은 아트지로 만든 속표지가 나온다. 표지에 있었던 활자와 손글씨가 이번에는 고적한 호숫가를 표현한 수묵화를 밑에 놓고 모두 세로 글자로 나란히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뒷면에는 문집 『산호와 진주』의 제목이 나오게 된 출전을 짐작하게 하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 문구 “깊고 넓은 바다 속에 / 너의 아빠 누워 있네 / 그의 뼈는 산호 되고 / 눈은 진주 되었네”가 인쇄되어 있다. 그다음 쪽에는 ‘신판을 내면서’가, 그다음 쪽에는 『산호와 진주』에 실렸던 ‘서문’이 2쪽에 걸쳐 실려 있다. 이윽고 서문을 넘기면 홀수 쪽부터 6쪽에 걸쳐 ‘차례’가 나온다. 다만, 차례를 보면 실제 구성과 달리 ‘서문’ 다음에 ‘신판을 내면서’가 나오고 있어 살짝 아쉬웠다.
이렇게 118쪽에 걸쳐 본문이 끝나고 나면 간기면(刊記面)이 등장하는데, 인지(印紙) 및 서지사항이 적인 작은 별지(別紙)를 인쇄하여 붙여 놓았다. 인지에는 한글로 ‘피천득’이라는 이름 석 자가 새겨진 도장이 찍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책값은 ‘1,500원’이었으며, 발행인은 ‘한만년(韓萬年)’, 인쇄소는 ‘삼원인쇄소’로 표기되어 있다.
피천득은 평생을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처럼 살았다. 춘원 이광수가 “거문고를 타며 노는, 때 묻지 않은 아이의 마음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준 아호 ‘금아(琴兒)’처럼 살다 간 것으로 유명하다. 실제로 그는 딸 ‘서영’이 어릴 때 갖고 놀던 인형을 목욕시키고 머리를 묶어주는 인형 놀이를 좋아했으며, 평소 흠모했다는 작가 ‘바이런’과 ‘예이츠’ 그리고 스스로 ‘마지막 애인’이라고 불렀다는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먼’의 사진을 가까이 두는 등 천진난만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나아가 피천득의 딸에 대한 사랑 또한 특별했다(그의 슬하에는 아들도 둘이 있었다). 그의 수필 속에 딸의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 건 물론이고, 아예 ‘서영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통해 다음과 같이 노골적으로(?) 딸바보임을 드러내고 있다.
서영이는 내 책상 위에 ‘아빠 몸조심’이라고 먹글씨로 예쁘게 써 붙였다. 하루는 밖에 나갔다 들어오니 ‘아빠 몸조심’이 ‘아빠 마음조심’으로 바뀌었다. 어떤 여인이 나를 사랑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랬다는 것이다. <중략> 아무려나 서영이는 나의 방파제이다. 아무리 거센 파도가 밀려온다 하더라도 능히 막아낼 수 있으며, 나의 마음 속에 안정과 평화를 지킬 수 있다.
― 수필 ‘서영이’ 중에서
그뿐 아니라 시집 『금아시선』에도 실려 있는 문집 『산호와 진주』의 서문에서도 “나에게 글 쓰는 보람을 느끼게 하는 서영이에게 감사한다”라며 어김없이 딸에 대한 사랑을 내비치고 있다. (딸 서영 씨는 미국에서 MIT 물리학 교수인 남편과 함께 살고 있으며, 슬하에 촉망받는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피 재키브(Stefan Pi Jackiw)를 두고 있다)
아울러 평생에 걸친 피천득의 어머니(엄마)에 대한 그리움 또한 절절하게 작품으로 승화되었다. ‘엄마’라는 제목의 수필 중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표현을 보면 그가 얼마나 어머니를 애틋하게 그리워했는지 잘 알 수 있다.
“나는 엄마 같은 애인이 갖고 싶었다. 엄마 같은 아내를 얻고 싶었다. 이제 와서는 서영이나 아빠의 엄마 같은 여성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나의 간절한 희망은 엄마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밤이면 엄마는 나를 데리고 마당에 내려가 별 많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북두칠성을 찾아 북극성을 가르쳐주었다. 나는 그때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불행히 천문학자는 되지 못했지만, 나는 그 후부터 하늘을 쳐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엄마는 나에게 어린 왕자 이야기를 하여 주었다. 나는 왕자를 부러워하지 않았다. 전복을 입고 복건을 쓰고 다니던 내가 왕자 같다고 생각하여서가 아니라 왕자의 엄마인 황후보다 우리 엄마가 더 예쁘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예쁜 엄마가 나를 두고 달아날까 봐 나는 가끔 걱정스러웠다. 어떤 때는 엄마가 나를 버리고 달아나면 어쩌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때 엄마는 세 번이나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영영 가버릴 것을 왜 세 번이나 고개를 흔들었는지 지금도 나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일까. ‘엄마’라는 수필은 다음과 같이 ‘아가의 기쁨’이라는 시로 다시 표현된다.
엄마가 아가 버리고 달아나면 어쩌느냐고
시집가는 색시보다 더 고운 뺨을
젖 만지던 손으로 만져 봤어요
엄마는 아가 버리고 아무 데도 못가겠다고
종알대는 작은 입을 맞춰 주면서
세 번이나 고개를 흔들었어요
― 시 ‘아가의 기쁨’ 전문
어쨌든 피천득의 문학세계는, 그리고 문학을 생각하는 관점은 자신의 글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인생의 ‘아름다움’과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인간 본연의 의지와 온정’에 대한 찬사였다. 이 같은 문학관을 몸소 실천한 듯 그의 삶은 그가 일구어 온 문체처럼 소탈하고 검소했다. 담배와 술은 평생 멀리했고, 틈나는 대로 산책과 클래식 음악을 즐겼으며, 이렇다 할 인테리어나 장식품 하나 갖추지 않은 자그마한 아파트에서 살았다. 그리고 그에게는 두 여인이 있었다. 아마도 그 여인들 때문에 선생은 지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천상에서도 행복하게 미소 짓고 있을 것이다.
내 일생에는 두 여성이 있다. 하나는 나의 엄마고 하나는 서영이다. 서영이는 나의 엄마가 하느님께 부탁하여 내게 보내주신 귀한 선물이다. 서영이는 나의 딸이요, 나와 뜻이 맞는 친구다. 또 내가 가장 존경하는 여성이다.
― 수필 ‘서영이’ 중에서
김기태 '처음책방' 설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