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마치' 시리즈 등 2000년대 초기작 6점
아랍권 토착 민족과 현대 문명의 충돌 담아
지난해 베네치아 비엔날레 이집트관 대표작
식민지배 다룬 '드라마 1882'…대기만 3시간
"예상 대기시간 세 시간입니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지난해 4월 이탈리아에서 열린 베네치아 비엔날레. 행사장인 자르디니 공원 북부에 들어선 이집트관의 현장 안내 요원이 입장을 기다리는 관객들한테 이렇게 말했다. 80개 넘는 참가국이 각자 조성한 전시장 중에서도 이집트관은 유독 장사진을 이뤘다. 이유는 하나. 영상과 소리, 설치작업으로 전시장을 무대처럼 꾸민 이집트 작가 와엘 샤키(54)의 존재감 때문이었다.
역사의 통·번역사를 자처하는 샤키의 작업은 '기록된 역사를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란 고민에서 출발한다. 이집트 출신인 그는 1970년대 원유 사업이 떠오르던 시절 사우디아라비아 메카로 이민 갔다. 베두인족 등 토착 민족의 전통과 현대화의 물결이 충돌하던 시절이다. 서구 중심으로 기록된 역사에 의문을 품은 작가는 아랍 사회의 모순을 화면에 담기 시작했다.
와엘 샤키, '텔레마치 교외(Telematch Suburb)'(2008) /바라캇컨템포러리 제공이번 전시에 걸린 3점의 '텔레마치' 연작이 이때 나온 작품이다. 제목의 텔레마치는 1970년대 서독에서 방영된 버라이어티 쇼에서 따왔다.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서 교류하는 내용을 담은 프로그램으로, 이들이 경쟁하는 과정에 오락적 요소를 더했다. 작가는 "유년기를 보낸 사우디에서도 인기몰이했던 프로그램 형식에 착안한 작업"이라고 했다.
각 작품은 어울리지 않는 사회 단면들이 충돌하는 과정을 TV쇼처럼 그려낸다. '텔레마치 교외'는 나일강 삼각주의 한 시골 마을에서 열린 헤비메탈 밴드의 공연 영상을 담았다. 관객의 열띤 호응을 기대하고 봤다간 오산이다. 밴드 공연에 익숙지 않은 주민들의 황당해하는 반응이 작품의 핵심이다.
와엘 샤키, '동굴(암스테르담)'(2005) /바라캇컨템포러리 제공이런 부조화는 지하 1층에 걸린 '동굴(암스테르담)'에서 극에 달한다. 작가가 직접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슈퍼마켓에서 쿠란의 한 장을 암송하는 장면을 촬영했다. 상품이 즐비한 매대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보일 법한 모습으로, 현시대의 자본주의를 상징한다. 작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주민들의 표정이 압권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20년 전 작품이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현재까지 통한다"고 말했다. 오늘날 아랍 지역에서 벌어지는 대립의 양상이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아서다. '알 아크샤 공원' 영상 속 건물은 미끄러지듯 회전한다. 작가는 "이슬람교와 유대교, 기독교 사이 쟁탈전이 벌어졌던 성지"라면서 "회전목마가 돌고 돌듯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분쟁도 끊이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와엘 샤키, '알 아크사 공원(Al Aqsa Park)'(2006) /바라캇컨템포러리 제공어린아이들이 주로 등장하는 것도 초기 작업의 주요 특징이다. 사막 오두막에 드나드는 아이들을 먼발치에서 관찰한 '텔레마치 셸터'가 단적인 예다. 백지상태와도 같은 아이들은 무언가 촬영한다는 사실만 간신히 인식한다. 등장인물의 연기 실력이나 성별 등에 따른 해석과 거리를 두기 위해서다. 바라캇컨템포러리 관계자는 "이런 초기 설정은 작가의 근작에서 꼭두각시 인형과 가면이 등장하는 형식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최근엔 역사적 서술에서 나아가 공연예술과의 결합을 시도하고 있다. 지난달까지 대구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에선 한국의 구전설화와 전래동화를 판소리로 재해석한 '러브스토리' 등 신작을 선보였다. 오는 5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선보인 '드라마 1882'를 상영한다.
전시는 바라캇컨템포러리에서 4월 27일까지.
와엘 샤키, '텔레마치 쉘터(Telematch Shelter)'(2008) /바라캇컨템포러리 제공
'와엘 샤키: 텔레마치와 다른 이야기들' 전시 전경. /바라캇컨템포러리 제공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