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스포츠라 불리는 축구의 위상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K리그는 오랜 기간 인기가 없었다. 그러나 2024년 기준 누적 관객 350만 명을 달성하며 큰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예전부터 K리그 팬이었던 나로서는 관중이 빼곡한 최근의 경기장이 생경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만약 당신이 축구를 보러 K리그 경기장을 찾는다면, 축구만큼이나 예상 밖의 풍경에 눈길을 빼앗길 것이다. 경기 내내 응원가를 부르고 깃발을 흔드는 서포터즈들이 바로 그것이다. 축구 경기만큼이나 홈과 원정 팬이 펼치는 응원 대결은 볼거리다. 그들은 매주 전국 어디로든 북과 깃발을 들고 찾아가 자신의 팀을 위해 헌신적인 응원전을 펼친다. 90분 동안 이어지는 응원가와 형형색색의 깃발을 흔드는 응원 문화는 어디서부터 기인하는 것일까. 남부 유럽의 축구 문화가 수혈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특히 K리그 응원가에서 'Alé Alé'라는 가사가 자주 들려오는 것은, 남부 유럽 축구 문화의 영향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시다.
영화 <우리는 울트라스> 스틸컷 / 출처. IMDb사실 한국의 서포터즈는 유럽의 응원 문화에서 팬덤적인 부분만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인 형태에 가깝다. 유럽의 서포터즈 문화는 좀 더 정치적, 사회적 신념과 계급의식이 융합된 형태를 띤다. 그래서 같은 도시의 구단일지라도 내가 어떤 사회적 계급과 정치의식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지지하는 팀이 다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런던의 경우, 첼시는 부유한 웨스트 런던의 상류층, 아스널은 중산층, 웨스트햄은 동쪽의 노동자 계급과 연결되어 있고 이러한 계급적 차이가 팬 문화와 정체성을 뚜렷하게 구분 짓는다.
특히 유럽에서는 일반 서포터즈보다 더 극단적인 집단들이 빈번하게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기도 한다. 이들 조직은 엄격한 위계질서가 존재하며, 축구 응원을 넘어 자신들의 정체성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폭력까지 서슴지 않는다. 그들은 '서포터즈'라는 용어로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모두 표현할 수 없다고 여기며, 스스로를 '울트라스'라고 차별하여 부르기도 한다. 넷플릭스 영화 <우리는 울트라스>는 이러한 문화적 배경을 이탈리아 나폴리의 가상 울트라스 '아파치'를 통해 조명하며 그들의 삶을 깊이 있게 탐구하는 작품이다.
영화는 아파치의 1세대 리더인 산드로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폭력에 염증을 느끼고 울트라스 조직을 탈피하고 싶어 하는 그는 3세대 소년 안젤로와 새로운 우정을 쌓아가며 변화를 꿈꾼다. 하지만 여전히 폭력에 의지하는 2세대의 반발로 조직은 분열의 위기에 놓인다. 세대 간의 가치관 차이와 권력 다툼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산드로는 말 그대로 진퇴양난에 빠진다.
영화 <우리는 울트라스> 스틸컷 / 출처. IMDb이 영화의 감독인 프란체스코 레토리(Francesco Lettieri)는 나폴리 출신으로, 자신이 목격한 울트라스의 인간군상을 날것 그대로 담아낸다. 연출적으로 흥미로운 지점은 정작 축구 경기나 선수는 한 번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미 폭력행위로 경기장 출입이 금지된 산드로의 삶처럼, 쇠락의 길을 걷는 황폐한 나폴리의 뒷골목, 대마 연기가 가득한 어두운 클럽, 폐허가 된 건축물 속에 머무는 울트라스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불투명한 미래 속에 그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집단적 연대와 야수성의 표출뿐이다. 감독은 이렇게 절망만이 가득한 공간과 무정할 정도로 아름다운 나폴리 해변의 청량한 절경을 대비시켜, 그들이 갇힌 현실과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개인적 열망 사이의 아이러니를 강조한다.
산드로가 지난 시간 점철된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평생 나폴리인으로서 느껴온 분노와 소외감이 그의 피와 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젊은 안젤로에게 더 나은 미래를 바라지만, 안젤로 역시 울트라스 활동 중에 살해당한 형의 복수심 때문에 이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개인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결국 집단적 정체성에 의지하는 모습은, 소외된 개인이 집단에 얼마나 쉽게 잠식될 수밖에 없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영화 <우리는 울트라스> 스틸컷 / 출처. IMDb물론 폭력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감을 입증하려는 그들의 방식은 우리에게 쉽게 와닿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모순 속에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폴리의 역사와 정체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탈리아에는 캄파닐리스모(Campanillismo)라는 독특한 지역 정체성이 존재한다. 이는 각 도시의 종탑을 중심으로 형성된 공동체 의식을 뜻한다. 이탈리아가 오랜 기간 분열된 도시국가로 존재했던 역사적 맥락에서 생겨난 개념이다.특히 남부의 나폴리는 북부 지역과의 경쟁과 대립 속에서 형성된 정체성이 강하다. 1861년 이탈리아의 통일 과정에서 남부의 나폴리 왕국이 북부로부터 정복당한 것을 시작으로, 근대화 과정을 통해 남북 간의 불균형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런 역사적 맥락 속에서 축구는 남북 간의 적대감이 표출되는 하나의 투기장이 됐다. 영화는 아파치 조직원들이 살아가는 나폴리 사회의 풍경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데, 전쟁의 폐허를 연상시키는 도시의 모습과 경찰서 화장실에 휴지도 없다는 자조적인 경찰관의 대사는 남부인들이 느끼는 열악한 현실과 절묘하게 오버랩 된다.
"우린 절대 널 혼자 두지 않아. 우리는 베수비오 산의 아들. 언젠가 폭발할지 모르지. 일요일 3시, 너와 함께한 인생, 너 없이 지낼 순 없네. 언젠가 내가 죽으면 하늘에서 내려다볼게."
영화 <우리는 울트라스> 스틸컷 / 출처. IMDb<우리는 울트라스>는 축구가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 역사, 정체성, 계급, 정치가 한데 어우러져 표출되는 무대임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지구 반대편의 어떤 경기장에서 마주하는 응원 소리는 단순한 스포츠 열기가 아닌, 오랜 역사적 상처와 사회적 모순을 담고 있는 외침이다. 축구에 폭력을 결합시키는 울트라스의 행동은 결코 옹호될 수 없지만, 그 이면에는 이렇게 깊은 사회적 맥락이 존재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함을 일깨우는 메시지다.가성문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