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 뮤지컬이 지루하다고?…부채 하나로 완성한 전장의 몰입감

적벽

판소리와 현대무용의 만남
여성이 조조·유비 역할 맡는 등
현대적 연출로 적벽가 재해석
‘판소리 뮤지컬’이 지루할 것이란 편견은 이제 버리자. 가슴을 울리는 웅장한 판소리 합창에 감각적인 현대무용이 어우러진 뮤지컬 ‘적벽’(사진)은 관객을 적벽대전의 치열한 전투 한복판으로 데려다 놓는다. 칼군무로 펼쳐지는 부채쇼 역시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판소리 뮤지컬만의 볼거리다.

국립정동극장의 대표 레퍼토리 작품인 ‘적벽’은 1368년께 발간된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와 500여 년 후 이를 바탕으로 조선에서 불렸던 판소리 ‘적벽가’를 토대로 한다. 익숙한 이야기지만, 우아하면서도 역동적인 몸짓과 현대적인 무대 연출이 신선하게 다가오는 작품이다. 2017년 초연 이후 올해로 여섯 번째 무대를 이어가고 있다. 젊은 관객은 물론 외국인 관광객 사이에서 입소문을 탈 정도로 호평받고 있다.

‘적벽’은 3세기 한나라 말 무렵 위·한·오나라가 치열한 세력 다툼을 벌이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도창의 해설에 따라 유비와 관우, 장비가 의형제를 맺는 도원결의, 장판교 전투, 적벽대전 등의 흐름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단순한 전쟁 이야기를 넘어 유비, 관우, 장비, 제갈공명, 조조 등의 신념과 야망이 얽힌 깊은 감정의 드라마가 무대를 가득 채운다.

주요 배역에 성별 구분을 두지 않는 ‘젠더프리 캐스팅’을 도입했는데 어색함이 전혀 없었다. 더블 캐스팅인 조조와 유비 역할을 여성 배우인 이승희와 정지혜가 각각 맡았다. 제갈공명은 물론 유비 휘하 장수인 자룡과 조조의 책사 정욱 등도 여성 배우가 연기한다. 이는 기존 삼국지에서 남성 중심적으로 그려진 캐릭터들이 재해석되는 동시에 성별을 뛰어넘어 인물의 본질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한다.

배우들의 맨발 투혼도 인상적이었다. 100분 동안 이어지는 판소리 합창만으로도 힘에 부칠 텐데 신을 벗고 무대를 누비고, 전장에 뛰어들 듯 몸을 내던진다. 유일한 소품인 부채를 칼, 활, 방 등으로 다채롭게 활용하고, 배우들끼리 완벽한 합으로 부채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붉은빛 레이저 조명도 강렬한 분위기를 더한다.

유연한 무대 활용도 돋보였다. 유비와 관우, 장비의 삼고초려 끝에 등장하는 제갈공명은 무대가 아니라 객석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제갈공명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키는 동시에 관객이 이야기 속 한 인물처럼 느껴지게 하는 무대 연출이다. 무대 뒤편에서 북, 거문고 등 전통 악기를 연주하던 이들도 극의 흐름 속에서 역할을 맡으며 단순한 배경으로 그치지 않는다.

판소리 특유의 한문체 표현과 사극적 대사가 자칫 난해할 수 있지만, 무대 양옆 스크린에 제공되는 한글과 영어 자막이 관객들의 이해를 돕는다. 가령 삼고초려 장면에서는 “(제갈공명이) 초당에 춘수 깊어 계셔”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이는 한글 대사와 함께 “taking a nap”이란 영어 대사로 번역돼 외국인 관객도 어렵지 않게 극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다. 공연은 다음달 20일까지.

허세민 기자 se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