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이 그린 '수성동 계곡' 속 다리의 정체는

[arte] 한이수의 서촌기행

수성동 계곡 '기린교'와
옥인 시범아파트에 담긴 삶 이야기
서울 서촌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꼽으라면 누가 뭐래도 수성동(水聲洞)계곡이다. 암반 사이로 흐르는 물소리가 만 마리의 말이 달릴 때의 소리처럼 크게 들린다는 인왕산 아래 자락의 계곡이다. 10년 전 이곳을 찾았던 기억을 잊지 못한다. 내가 다니던 직장에서 광고주들과 서촌에서 식사할 기회가 있었다. 식사 후 우리 일행은 서촌의 한 와인 샵으로 갔다. 차를 타고 가는 도중 창밖으로 보이는 예사롭지 않은 풍광에 넋을 잃었다. 아니 서울에 이런 곳이 있단 말이야! 그 주 토요일에 아내와 함께 다시 서촌을 찾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간 곳이 인왕산 끝자락의 수성동 계곡이다. 범상치 않은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이후 여러 이유로 더 찾아가면서 나의 서촌 사랑은 시작되었다. 책을 찾아보고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아는만큼 보인다는 유홍준 교수의 말처럼 더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성동 계곡. / 사진. ⓒ한이수
수성동 계곡. / 사진. ⓒ한이수
가장 놀라웠던 것은 이곳에 얼마 전까지 사람들이 아파트를 지어놓고 살았다는 것이다. 옥인 시범아파트. 무분별한 개발 시대의 논리가 풍광 아름다운 이곳도 피해 가지 못했다. 당시 서울시장 김현옥은 서울의 주택난을 해결한다고 시민아파트를 공급하는 중이었다. 주로 산꼭대기에 지었는데 부하들이 왜 이런 높은 곳에 아파트를 짓느냐고 하면 그래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 아니냐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1971년 지어진 옥인 시범아파트는 높은 빌딩이 많지 않은 시절, 아파트 입지 조건의 0순위였을 것이다. 서울에서 이만한 풍광을 자랑할 만한 곳이 있을까? 이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던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니, 아파트에 살면서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계곡에 멱을 감고 놀았다고 했다. 이곳에는 옥인 시범아파트 9개 동이 있었다. 인왕산 계곡물을 피해 세로로 길게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다.

그런 시민아파트가 30여 년이 흐르니 노후화되기 시작했고, 다시 지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서울시는 1997년에 시민아파트 정리계획을, 2002년에 노후 아파트 정리 특별대책을 수립했는데 오세훈 서울시장은 시민아파트를 헐고 원래의 인왕산 모습으로 조성하려고 했다. 현재 윤동주 시인의 언덕 자리에 있던 청운 아파트도 철거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철거 계획에 탄력이 붙었다. 이것은 오세훈의 '내사산 르네상스'의 일환으로 추진된 것이다. 길게 보면 이명박 서울시장 재임 당시 청계천 상류 복원 사업으로 고려된 것이기도 하다.

이때는 어디서도 '수성동 계곡'이란 말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철거 계획이 나온 후 '조선시대 돌다리 발견(연합뉴스 9월 14일)'이라는 뉴스가 나왔다. 그러면서 철거 후 복원 계획이 인왕산 녹지 복원이 아니라, 수성동 계곡 복원으로 옮겨 갔다. 사실 이 아파트 철거가 논의되기 시작한 2007년에 이미 청와대 경호실에서는 청와대 주변의 여러 문화재를 조사했고 그동안 사라진 줄 알았던 인왕산 계곡에 있던 돌다리의 정체를 책으로 발간했다. 아파트에서 계곡으로 연결하는 다리로 사용되고 있었던 돌다리는 시멘트가 덮이고 난간이 박힌 채 거의 방치 수준으로 있었다. 이 돌다리의 정체는 무엇인가?

여러 학자의 고증에 의하면 이 돌다리는 '신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여러 고서에 등장하는 '기린교'였다. 옥인 시범아파트가 건설되던 1960년대 후반에 사라진 줄로 생각했던 다리이다. 김영상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이 1994년 출간한 ‘서울 육백년'에 ‘수성동에 걸려 있던 기린교 돌다리’란 설명과 함께 실린 사진과 똑같은 다리였다. 기린교는 그냥 아무 곳에서나 볼 수 있는 돌 폭 70cm 두께 35cm, 길이 3.7미터의 장대석 두 개를 이어 붙인 것과 같은 모습인데, 그 이상의 의미로 수성동 계곡 복원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왜냐하면 겸재 정선의 '수성동 계곡'이라는 그림에 등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영상의 서울 육백년에 수록된 기린교의 모습. / 사진출처. 서울 육백년
기린교? 동물 기린에서 따온 말이다. 기린은 우리가 아는 목이 긴 그 동물이 아니다. 고서에 등장하는 상상 속의 동물이다. 사슴과 소가 교미하여 태어난 동물로, 수컷은 기(麒)라 하고, 암컷은 린(麟)이라 한다. 기린은 성인이 태어날 때 그 징조로 나타나는 동물이라고 한다.

이 기린교의 발견으로 모든 것이 멈췄다. 다시 생각을 고쳤다. 복원의 방향이 겸재 정선의 '수성동 계곡' 그림처럼 복원하기로 한 것이다. 혹자는 그림처럼 복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겸재 정선하면 떠오르는 말, '진경산수'가 아닌가? 이 그림대로 복원하면 조선 시대의 풍광처럼 재현할 수 있는 것이다. 겸재 정선이 그린 <장동팔경첩>의 '수성동 계곡'을 통해 당시의 모습으로 돌아가 보자. 사람들이 뒷짐을 지고 기린교를 넘어 널따란 너럭바위로 간다. 사람들의 모습이 너무도 한가롭다. 마치 저녁을 먹은 후 마실을 가는 모습이다. 이곳은 추사 김정희의 시에도 등장한다.

푸르름 물들어 몸을 싸는 듯/ 대낮에 가는데도 밤인 것 같네./ (중략) 낙숫물 소리 예전엔 새 소릴러니/ 오늘은 大雅誦(대아송)같다./ 산 마음 정숙하면 새들도 소리 죽이나/ 원컨대 이 소리 세상에 돌려/ 저 속된 것들 침 주어 꾸밈없이 만들었으면.
- <수성동 우중에 폭포를 구경하다(水聲洞雨中觀瀑此心雪韻)>
겸재 정선, &lt;장동팔경첩&gt;의 '수성동 계곡'. 사진 왼쪽에 하단에 기린교의 모습이 보인다. / 이미지출처. 간송미술관
전에는 이곳이 우거져 대낮에도 밤처럼 어둡고 바위 사이에서 들리는 소리가 마치 독경 소리처럼 낭랑하게 들린다는 얘기다. 지금은 그때와는 비교하기도 어렵지만, 아직도 비가 오고 나서 이곳에 오면 추사 김정희의 마음을 조금은 헤아리게 된다. 바위틈 사이로 흐르는 물소리가 양쪽 암반을 공명하며 콸콸콸 흐른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내 마음에도 수 만마리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 마음이 요동친다.

그러면 이것을 복원하는 비용이 얼마나 들었을까? 주민 이주 비용으로 980억원, 복원 비용이 80억이다. 그러니 복원 비용으로 1060억원이 투입되었다. 아파트를 철거한 자리에 남아 있는 바위를 두드러지게 하고, 계곡 양쪽에 전통 방식의 돌쌓기를 하는 등 그림 속처럼 암석 지형 회복에 중점을 뒀다. 또 옛 경관 복원을 위해 구부러진 소나무 등 나무 1만8477그루를 심었다. 돈은 많이 들었지만 지금 서울시민들이 이곳을 찾아 150여 년 전 겸재와 추사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문화적인 경험을 한다면 그것으로 본전을 뽑고 남지 않을까?

그런데 복원 과정 이후에 아픔도 있었다. 아파트는 철거된다 해도 거의 40년을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남아 있지 않겠나. 아파트 철거 과정에서 떠나기 싫은 데도 어쩔 수 없이 떠난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파트가 철거될 때 '옥인콜렉티브'라는 예술 단체가 설립되었다. 이들은 철거 예정인 옥인 시범아파트에 남겨진 물건들을 모아서 이곳에서 살았던 이들을 추억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아파트 옥상에 모여 불꽃놀이를 하고, 옥상에서 바캉스 퍼포먼스도 진행했다. 개발과 삶의 충돌을 예술적 행위로 옮겨 옥인 시범아파트의 추억을 소환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그들은 개발 과정 속에서 사라지는 개인의 삶과 사라져 가는 역사에 주목했다. 힘센 권력에 용기 있게 돌을 던지는 예술가들이었다.

누구보다 두려움 없이 씩씩하게 세상을 살아갈 줄만 알았던 옥인콜렉티브 멤버는 이 행사 후에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옥인콜렉티브 멤버인 부부 이정민, 진시우 작가는 함께 활동한 예술가들에게 마지막 메일을 보내고 2019년 세상을 등졌다. “바보 같겠지만 ‘작가는 작업을 만드는 사람’, ‘예술이 전부인 것처럼 사는 삶’이라고 생각했다” 작가가 메일로 남긴 마지막 인사이다.
옥인콜렉티브가 진행한 '바캉스 프로젝트'. 옥인 시범아파트의 철거 전 2층 옥상에서 진행했다. / 사진출처. 올해의 작가상 홈페이지
자연을 예술로 승화시킨 겸재 정선, 그 풍광에 아파트를 짓기도 하고 다시 복원한 서울시장, 그 과정을 퍼포먼스로 진행한 예술가들. 현실과 그 현실을 재현하는 예술. 이 모든 것이 수성동 계곡에 가면 녹아 있다. 비 오는 날 수성동 계곡에 가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잠재우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한이수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