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종문화, 페미니즘 … 래리 피트먼의 ‘시각적 과잉’에 숨은 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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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리 피트먼 개인전 ‘거울&은유(Mirror&Metaphor)’
전남도립미술관에서 6월 18일까지
동시대 미술 회화에서 중요한 작가
혼종문화·페미니즘 정체성으로 독특한 회화 개척

세계적인 갤러리 리만 머핀이 2021년 서울 한남동에 전시장을 열어 미술 열기가 뜨겁던 한국 시장 공략을 위한 첫 출사표로 피트먼의 작품을 내놨던 건 이런 이유에서다. 복잡한 기호와 상징적 어휘, 혼돈 속 질서가 보이는 정교한 테크닉, 색채와 텍스트, 이미지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은 그의 독창적인 회화를 설명하는 특징이다.

라틴 문화 깃든 장식미
피트먼의 회화는 미국 화단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장식미가 두드러진다. 그의 정체성의 기반이 ’혼종 문화‘이기 때문이다. 미국인 아버지와 콜롬비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유년 시절을 콜롬비아에서 보냈고, 1980년대 이후엔 멕시코시티에서 자주 머물며 멕시코의 전통 미학에서 영감을 얻었다. 커다란 보석을 소재 삼은 '디오라마' 연작이나 패턴이 두드러지는 ‘후기 서구 제국의 진기한 물건들’이 대표적이다.
이날 전시장에서 만난 피트먼은 “미국의 백인 앵글로-색슨 문화권에선 장식 요소가 작품의 내용을 방해한다고 보는 문화가 있지만, 라틴아메리카 문화에선 장식 요소가 있는 그대로 내용이 되고, 또 이미지가 되기도 한다”면서 “미국과 라틴아메리카 문화의 하이브리드(혼종) 적인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개념과 장식미를 동시에 보여주는 게 가능하다”고 말했다.
피트먼의 예술을 설명하는 또 다른 중요한 정체성 중 하나가 페미니즘이다. 1970년대 캘리포니아 예술대학(CalArts)을 다닌 그는 당시 유행하던 1세대 페미니즘 미술에 큰 영향을 받았다. 백인·남성·서구 위주의 보수성이 강했던 당대 미술계에서 여성이나 흑인, 성소수자의 해방은 색다른 예술적 담론을 얻을 수 있는 창구였기 때문이다. 피트먼은 “페미니즘이라는 렌즈로 미술사를 보면,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인다”고 했다.
이를 관통하는 핵심이 ‘알(Eggs)’이라는 시각적 모티프다. 전시에 나온 대형 작품 ‘알 기념비가 있는 반짝이는 도시’ 등이 대표적이다. 작품마다 알은 세계 그 자체이거나 부화할 준비를 마친 생명 등으로 묘사된다. 전남도립미술관 측은 “낙관, 재생을 포함한 풍요로움에 뿌리를 둔 페미니즘적이고 생성적인 세계관”이라고 설명했다. 20세기 벌어진 전쟁과 냉전 등이 남성적인 틀로 이해된다는 점에서 피트먼은 안티테제(반정립)로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알이라는 여성적 이미지를 내세운 것이다.
AI처럼 작업, AI가 그릴 수 없는 이유
피트먼의 작품은 일견 AI가 생성한 이미지 같기도 하다. 어지러울 만큼 많은 이야기와 상징이 담겨 있고, 시각적 과잉이라 할 만큼 이미지가 가득해서다. 커다란 거인이 세계를 감싸고 있는 것 같은 ‘아이리스 샷 열림과 닫힘’ 연작의 경우엔 미드저니 등 생성AI가 그려낸 것 같은 느낌도 있다. 실제로 피트먼은 그림을 그리기 전 책상에 앉아 어떤 콘셉트로, 어떤 색을 쓸지 등 작품의 개요를 적어 내려간다. 생성AI의 프롬프트(명령어)와 비슷한 셈이다.
전시에는 ‘카프리초스’, ‘녹턴’ 등 피트먼이 지난 14년간 제작한 작품 40여 점이 나왔다. 지난해 중국 상하이 롱 뮤지엄에서 연 전시인 ‘매직 리얼리즘(Magic Realism)’과 콘셉트가 비슷하지만, 전시 규모는 훨씬 크다. 전시는 6월 15일까지.
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