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봉투 260만원에 판 디자이너…구찌 파격 영입에 '충격' [안혜원의 명품의세계]

[안혜원의 명품의세계] 81회

위기의 구찌
발렌시아가 출신 스타 CD 영입
시장의 불신에도…구찌 부활할까
사진=AFP/발렌시아가 홈페이지
사진=AFP/발렌시아가 홈페이지
“구찌의 도박.” 프랑스의 대표 일간지 르몽드는 럭셔리 패션그룹 케링의 구찌가 발렌시아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를 지낸 뎀나 그바살리아(사진)를 새로운 아티스틱 디렉터로 임명했다고 밝히자 이 같이 표현했다. 이 소식이 알려진 이튿날인 14일(현지시간) 파리 증시에서 구찌 모회사 케링의 주가는 종가 기준 10.7% 폭락했다. 르몽드는 ‘뎀나, 구찌의 도박’이라는 제목 기사에서 “공식 발표에 앞서 오전에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뎀나의 임명 소식을 접한 기자들 모두가 커피 한 모금 목으로 넘기는 것도 잊을 정도로 충격에 휩싸였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뎀나 그바살리아. 사진=AFP
뎀나 그바살리아. 사진=AFP

뎀나 그바살리아는 누구

앞서 구찌는 2023년 CD로 발탁한 사바토 데 사르노와 2년여만에 결별했다. 특유의 화려한 디자인이 ‘한 물 갔다’고 판단한 구찌는 사르노를 통해 '조용한 명품', ‘미니멀리즘’ 스타일을 구현하고자 했지만 이 같은 전략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는 평가다. 구찌는 지난해 4분기에만 매출이 24% 감소했다. 같은 기간 도매 매출만 놓고 보면 전년 대비 53%나 급감했다. 경쟁사인 리치몬트그룹과 에르메스, LVMH가 실적 반등을 이뤄낸 것과는 정반대 상황이다.

사실상 사르노를 경질하기로 결정한 구찌는 지난해 여름부터 새로운 CD 찾기에 나섰다. LVMH 산하 로에베 CD인 조너선 앤더슨, 생로랑·셀린느에서 능력을 보인 에디 슬리먼, 한때 루이비통 버질 아블로 후임으로 유력하게 거론됐던 마틴 로즈 등 남성복 디자이너 등이 물망에 올랐다. 하지만 구찌의 선택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뎀나였다. 뎀나는 로스앤젤레스(LA)에 부동산을 매입했으며 미국으로 떠날 것이란 소문이 돌았다. 2024년 여름 발렌시아가와 계약은 1년만 연장했다.
성장세 꺾인 구찌. 분기 판매 실적이 하락세다. 자료=WSJ 캡처
뎀나의 최근 작품인 발렌시아가 마지막 컬렉션은 특징적이지도, 시장의 호평을 얻지도 못했지만 한때 그는 패션계 트렌드를 뒤엎은 인기 디자이너다. 어글리 슈즈, 슈퍼 오버사이즈 후드 티셔츠 등 요즘 MZ세대(밀레니얼+Z세대)들이 가장 힙하다고 여기는 패션들이 모두 뎀나가 유행시킨 것들이다. 구소련 연방 조지아 출신 뎀나는 2014년 패션 브랜드 베트멍을 창립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베트멍에서 보여준 과감하고 실험적인 패션은 세계 패션계를 뒤흔들었고, 인기에 힘입어 발렌시아가 CD로 발탁됐다. 발렌시아가에선 명품과 스트리트 패션을 접목했다. 쓰레기봉투, 해진 운동화 등을 명품으로 재해석한 디자인을 공개해 눈길을 끌었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양말 같은 생김새로 ‘삭스슈즈(sock shoes)’라는 별칭이 붙은 ‘스피드 트레이너’와 발볼이 넓고 투박한 디자인으로 어글리 슈즈 열풍을 일으킨 ‘트리플 S’ 등 발렌시아가 주가를 최고로 끌어올린 제품들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쓰레기 봉투가 260만원?

뎀나는 마케팅 전략 또한 독특한 것으로 유명하다. 패션계를 경악하게 한 2024 봄 컬렉션 신상품 ‘타월 스커트’가 대표적이다. 수건을 무심하게 허리에 두른 것처럼 보이는 치마를 무려 925달러(약 135만원)에 내놨는데, 심지어 ‘올드머니 룩’ 트렌드를 따른다며 브랜드 로고까지 숨겼다. 영락없는 수건을 남녀 공용으로 스몰(S)과 미디엄(M) 두 사이즈로 내놓은 데다가 공식 홈페이지에서 선 주문(Pre order)까지 받았다.
발렌시아가 2024 봄 컬렉션에 선보인 ‘타월 스커트’. 사진=발렌시아가 홈페이지
그는 매 시즌 컬렉션마다 파격과 충격을 오가는 독특한 아이템을 선보이며 ‘이슈 몰이’를 했다. 앞선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지 2주 만에 열린 가을·겨울 컬렉션에선 런웨이에 눈보라를 흩날리고, 525개의 좌석 위에는 우크라이나 국기 색상의 티셔츠를 놓아 연대의 메시지를 전했다. 모델들은 난민을 상징하듯 커다란 검정 봉투를 들고 눈보라 속을 걸었다.모델들이 들고 나온 그 검정 봉투 가방의 이름이 바로 소셜미디어(SNS)를 강타한 ‘쓰레기 파우치(Trash Pouch)’다. 쓰레기 봉투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이 가방을 보고 누리꾼들은 ‘절대 쓰레기 봉투 옆에 놓지 마시오. 누가 버릴지도 모름’이라는 경고를 만들어 붙이기도 했다. 다만 이 가방은 비닐 봉투가 아닌 부드러운 송아지 가죽으로 만들어졌다. 출시 가격은 1790달러(약 260만원). 뎀나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쓰레기 봉투를 디자인할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고 했다.
뎀나가 쓰레기 봉투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쓰레기 파우치(Trash Pouch)’. 사진=발렌시아가 홈페이지
한국에서도 독특한 컬렉션을 내놓은 적이 있다. 베트멍을 운영하던 당시 한국에서 캡슐 컬렉션을 진행했는데, 한국에서 자신의 브랜드 ‘짝퉁’이 많이 거래되고 있으며 심지어 한국 디자이너들이 거의 유사한 모방 상품까지 내놓는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가품 베트멍'을 구매해 이를 재해석한 '오피셜 페이크 캡슐 컬렉션'을 열었다. 가품에 대한 일종의 경고와 함께 자신의 팬들에게 선사한 이벤트였던 셈이다.

이 같은 그의 행보에 평은 엇갈린다. ‘기존의 틀과 경계를 깨부순 디자인’이라는 찬사가 쏟아지는 동시에 ‘가난을 미화한 상술’이라는 비판도 받는다. 논란도 있다. 2022년 그가 기획한 발렌시아가 기프트 컬렉션 광고에선 어린이와 테디베어 인형을 망사와 가죽벨트, 자물쇠 등 가학적 성적 행위를 연상시키는 소품들로 장식했다는 이유로 비판 받았다. 비슷한 시기에 발렌시아가와 아디다스가 협업한 2023년 봄 시즌 컬렉션 광고 일부에서도 소아 성애 관련 미국 연방대법원 판결문을 모델 주위에 흩뿌려 놓고 촬영을 해 아동을 성적 대상화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발렌시아가는 결국 광고를 내리고 최고경영자(CEO) 명의 사과문을 내걸어야 했다.


구찌는 왜 뎀나를 CD로 택했나

중요한 사실은 이 같은 행보들이 '화제'가 된다는 점이다. 요즘 명품회사들은 CD에게 단순히 디자이너 역할만 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명품도 틱톡·유튜브·인스타그램 등 SNS 알고리즘을 타야 ‘빵’ 뜨는 세상이다. 디지털 플랫폼이 브랜드 성패를 좌지우지 한다고 보고 CD에게 마케터로서의 역량도 기대한다. 뎀나는 대중문화와 소비주의 결합한 홍보 전략으로 발렌시아가의 매출을 5년 만에 4배 가까이 끌어올린 성과가 있다. 바로 이 점이 구찌가 SNS 화제 몰이에 능숙한 뎀나가 적임자라 봤다는 분석이 나온다.

케링의 회장 겸 CEO인 프랑소아 앙리 피노는 “뎀나는 패션계, 발렌시아가, 케어링 그룹의 성공에 엄청난 기여를 해 왔다. 그의 창의력은 지금 구찌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프랑스 내 현지 외신들도 “3년 동안 케링 주가는 60% 이상 하락했다”며 “창립자의 아들인 프랑소아 피노는 더 이상 실수할 여지가 없기 때문에 CD 임명에 도박을 걸 수 밖에 없다”고 짚었다. 뎀나는 오는 7월 초부터 구찌에서 공식 업무를 시작할 예정이다.
뎀나 임명 이후 하락세가 두드러지는 케링그룹의 주가. 자료=BoF 캡처
다만 아직 시장은 구찌의 파격 결정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 영국 패션전문지 BoF가 최근 소비자 9000명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에서 ‘구찌가 뎀나를 CD로 임명한 것은 패션 브랜드로서 위상을 높이는 좋은 선택이다’라고 답변한 이는 10%에 불과했다. 응답자의 67%는 ‘구찌의 선택이 옳지 않다’고 했고, 23%는 ‘확신하지 못하며 결과를 두고 봐야할 것’이라고 답변했다.투자자들도 비슷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뎀나 특유의 스트리트패션이 구찌와 어울리지 않을 것이란 우려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JP모건은 투자 메모를 통해 “논란의 여지가 큰 선택이란 것이 패션업계 중론”이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지난 14일 뎀나의 CD 선임 사실이 알려진 뒤 케링그룹 주가는 단 하루도 반등하지 못하고 5거래일째 떨어지는 중이다.

안혜원 한경닷컴 기자 an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