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의 화풍이 음악으로 탄생했다...그라나도스의 '고예스카스'

[arte] 박소현의 백조의 노래

화가 고야의 작품을 음악적인 색체로 그린
엔리케 그라나도스의 유작 《고예스카스, 작품번호 11번》
한 시대를 빛낸 작곡가들의 마지막을 기리는 ‘백조의 노래’, 그 두 번째 작품은 바로 스페인의 위대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엔리케 그라나도스 (Pantaleon Enrique Joaquin Granados Campina, 1867-1916)’의 《고예스카스, 작품번호 11번 (Goyescas, Op.11)》입니다.

스페인의 위대한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 (Francisco Jose de Goya y Lucientes, 1746-1828)는 과감하면서도 광기마저 드러내는 작품들로 인상파의 문을 연 화가로 사랑받으며 마네나 피카소, 들라크루아와 같은 화가들 뿐 아니라 테데스코, 보들레르와 같은 다양한 작가와 음악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고야의 명화들을 접할 기회가 많았던 그라나도스 역시 그의 화풍을 자신의 음악으로 표현하고자 노력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14년 피아노 앞에 앉은 그라나도스 /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1914년 피아노 앞에 앉은 그라나도스 /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어린 시절 그라나도스는 피아니스트 호안 바티스타 푸욜 (Joan Baptista Pujol I Riu, 1835-1898)에게 피아노를, 스페인의 작곡가이자 음악학자이며 알베니스, 마누엘 드 파야와 같은 스페인의 대표적인 작곡가들의 스승인 펠리페 페드렐 (Felipe Pedrell Sabate, 1841-1922)에게 작곡과 화성을 배웠습니다. 위대한 작곡가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1887년 프랑스 파리로 유학길에 올랐으나 파리 음악원의 학생이 되지는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베리오 (Charles-Wilfrid de Beriot, 1833-1914)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2년간 파리의 생활을 마치고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돌아온 그라나도스는 점차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해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스페인으로 귀국 후인 1890년에 발표한 피아노 독주를 위한 《스페인 무곡집, 작품번호 37번 (Danzas espanolas, Op.37)》을 비롯하여 《피아노 오중주, 작품번호 49번 (Piano Quintet in g minor, Op.49)》, 《피아노 삼중주, 작품번호 50번 (Piano Trio, Op.50)》, 피아노 독주를 위한 《사랑하는 이삭에게 (A mi queridisimo Isaac)》 등의 다양한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던 그라나도스는 1898년에 초연을 올린 3막의 오페라 《마리아 델 카르멘 (Maria del Carmen)》이 대성공을 거두며 스페인을 대표하는 작곡가 중 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스페인 근대 피아노 음악의 아버지’라는 별명까지 얻게 된 그라나도스는 고야의 그림에 빠져들었으며, 우아하면서도 서정적인 스페인 젊은 청춘들의 사랑, 즉 ‘마하 (Maja)’와 ‘마호 (Majo)’의 사랑을 자신만의 음악적인 색채로 그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바로 ‘고야 스타일’, ‘고야의 풍으로’란 뜻을 지닌 제목의 피아노 독주 모음곡 《고예스카스》입니다.
[피아노 독주를 위한 고예스카스 - 백건우]

피아노 독주 모음곡 《고예스카스, 작품번호 11번》은 2권으로 구성되어 각각 1912년과 1914년에 출판되었습니다. 1911년에 이미 완성된 것으로 알려진 이 2권의 《고예스카스》의 수록곡은 총 7곡으로 고야의 작품들과 개별적으로 연결한 기록이 있지는 않지만 비슷하거나 동일한 제목을 통하여 고야의 명화와 연결 지어볼 수 있습니다.

제1곡 ‘사랑의 속삭임 (Los requiebors)’, 제2곡 ‘창가의 대화 (Coloquio em la reja)’, 제3곡 ‘등불 옆의 판당고 (El fandango de candil)’, 제4곡 ‘비탄, 또는 마하와 밤 꾀꼬리 (Quejas, o La Maja y el ruisenor)’는 제1권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제5곡 ‘사랑과 죽음 (El Amor y la muerte)’, 제6곡 ‘에필로그: 유령의 세레나데 (Epilogo: Serenata del espectro)’, 제7곡 ‘지푸라기 인형 (El Pelele)’는 제2권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1911년에 이 작품을 완성하였을 때는 마지막인 제7곡을 제외한 6곡으로 구성되었으나, 출판할 때 고야의 그림 <지푸라기 인형 (El Pelele)>에서 영감을 받아 추가로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7개의 수록곡 중 가장 유명한 곡인 제4곡 ‘비탄, 또는 마하와 밤 꾀꼬리’는 멕시코의 국민가요인 《베사메무초》의 소재가 된 작품이기도 합니다.
고야의 명화 &lt;지푸라기인형&gt; (1791~1792) / 그림. ⓒ프라도미술관, 출처. 위키피디아
그라나도스의 《고예스카스》는 ‘사랑에 빠진 용감한 사람들 (Los majos enamorados)’란 부제와 함께 발표와 동시에 전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그리고 그라나도스는 이 강렬하면서도 고난이도의 피아노 독주곡을 하나의 오페라 작품으로 만드는 작업에 들어갑니다. 스페인의 극작가 ‘페르난도 페리켓 (Fernando Periquet Zuaznabar, 1873-1940)’가 완성한 스페인 대본으로 1915년, 드디어 1막 3장의 오페라를 완성한 그라나도스는 프랑스 파리에서 초연을 올리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파리에서의 초연이 힘들어지고, 1916년 1월에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극장에서 초연을 올리기로 결정합니다.

위험천만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바다 건너 미국까지 건너가 초연에 참석하는 것에 대하여 오랜 시간 망설이던 그라나도스는 아내 ‘암파로 그라나도스 (Amparo Granados)’와 함께 뉴욕으로 향하는 배에 오르게 됩니다. 그렇게 오페라는 작곡가가 참석한 가운데 성공적인 초연 무대를 마쳤으며, 백악관에서 윌슨 대통령의 초대로 피아노 독주회까지 예정되자 그라나도스는 자신의 귀국을 연기하게 되었습니다.

1916년 3월까지 크고 작은 연주회와 녹음 등의 원래 일정보다 길어진 일정을 마치고 다시 귀향길에 오른 그라나도스와 그의 부인은 영원히 항해를 마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독일군이 부부가 탄 증기선을 격침하여 침몰하였고, 그렇게 스페인의 위대한 작곡가는 세계적인 명성을 뒤로하고 깊은 바닷속으로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화가의 화풍을 피아노 위로 새롭게 탄생시켜 성공한 작품 《고예스카스》, 그리고 오페라 《고예스카스》는 그라나도스의 유작인 ‘백조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그라나도스와 부인 암파로스 / 사진출처. musicologieorg
목격자의 진술에 따르면 그라나도스는 구명보트에 탄 생존자 중 한 명이었으나, 물속에 허우적대던 아내를 구하기 위해 바다로 다시 뛰어들었으나 두 사람 모두 구명보트 위로 다시 올라오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마치 오페라 《고예스카스》 속 주인공인 경비대장 ‘페르난도’와 귀족 ‘로자리오’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난 것처럼 위대한 작곡가와 그의 아내는 전쟁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라나도스가 오페라를 위해 추가로 작곡한 ‘간주곡 (Intermezzo)’이 지금도 따로 편곡되어 무대에 자주 오르며 지금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박소현 작가•바이올린/비올라 연주자

[오페라 <고예스카스> 中 간주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