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과 향 그리고 기억…기억의 스위치를 켜는 예술, 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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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엄마가 지어주시던 구수한 쌀밥 내음, 비 오는 날 뭉근히 퍼지는 젖은 흙냄새, 호텔 로비를 가득 채우는 진한 재스민 향기…. 오감(五感) 중 후각은 가장 강렬하고 원초적이다. 과학적으로도 후각은 감정과 기억을 저장하는 뇌의 편도체와 해마에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어떤 향을 들이마시는 순간 자신도 잊고 지내던 기억 저편 속 이야기가 떠올랐다는 이가 많은 이유다. 오로지 향기만으로 사랑에 빠지고, 숨 가쁜 일상에서 차분한 차향을 느끼며 편안함을 되찾기도 한다.
본능을 자극하는 강력한 힘 덕분에 향기는 인류 역사에서도 중요한 페이지를 차지한다. 5000년 전엔 신과 소통하는 통로였고, 중세 시대엔 왕가와 귀족만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이었다. 20세기 들어선 샤넬, 디올 등 명품 브랜드들이 ‘보이지 않는 럭셔리’를 위한 향수를 개발했다.
향기의 힘을 알아본 또 다른 이들은 예술가다. 전시장에 커피콩 냄새를 전시한 마르셀 뒤샹, 자신이 머무른 순간과 장소에 대한 기억을 향수로 남긴 앤디 워홀, 각 도시의 향을 수집해 지도를 만든 독일 베를린 기반의 현대미술가 시셀 톨라스까지…. 수많은 예술가가 향기를 통해 감각을 확장해왔다. 지난해 베네치아비엔날레 한국관 대표로 참가한 구정아 작가도 국내 복귀전으로 ‘한국의 향’을 전시하고 있다.
언어와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때때로 지치고 중요한 것을 잊는다. 인간은 오감을 갖춘 감각의 동물임을. 그럴 땐 그 어떤 감각보다 솔직하고 본능에 충실한 후각에 집중해보자. 혹시 모른다. 프루스트의 홍차와 마들렌처럼 기억 저편 속 잊혀 있던 또 다른 나를 발견할지.
비오는 날 흙냄새·밤 공기 香…미술관에 흐르는 추억의 향기
시각보다 '후각' 자극하는 전시

지난해 이탈리아 베네치아 비엔날레를 장식한 ‘한국 향의 기억들’이다. 구정아 작가는 한국의 향에 관한 기억으로 만든 17가지 향기를 전시했다. 전시 제목 ‘오도라마 시티’는 향기를 뜻하는 오도(odor)와 드라마(drama)를 합친 단어다. 향이 단순한 감각이 아니라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뜻한다.
이탈리아를 물들였던 이 향기들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서울 동숭동 아르코미술관으로 자리를 옮기면서다. 전시장에 들어서자 600편의 한국 향에 대한 기억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120개 배너에 향에 대한 기억들이 새겨져 있었다. 미술관 2층으로 들어서자 뫼비우스 띠 형상을 본떠 만든 17개 나뭇조각이 전시장 천장에 걸려 있었다. 각 조각에는 조향사 16명이 참여해 만든 향을 입혔다. 칸막이 없이 구성한 공간엔 도시 향기, 밤공기, 장작 냄새까지 여러 향이 뒤엉켜 있었다. 구 작가는 “향에 얽힌 추억은 대부분 감성적이지만 예리하기도 하다”며 “향은 보이지 않지만 정교한 재료이자 매체”라고 설명했다.
향은 감정을 동반한 기억을 불러낸다. 인간의 기억은 두 가지로 나뉜다. 사실과 정보를 기억하는 의미 기억과 개인적인 경험과 연결된 일화 기억이다. 향은 일화 기억을 자극한다. 향을 맡는 순간 그 정보는 뇌에 바로 전달돼 감정과 기억을 소환한다. 오래된 향수를 맡고 학창 시절을 떠올리거나, 빵 굽는 냄새를 맡고 지하철 환승장의 풍경이 스쳐 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후각은 다른 감각들보다도 기억에 강하게 남는다.
이처럼 인간의 기억, 감정과 깊숙이 결합한 향은 전시의 몰입감을 극대화한다. ‘올팩토리 아트(olfactory art)’가 등장한 이유다. 영어 단어 ‘olfactory’는 ‘후각의’라는 의미다. 말 그대로 후각의 예술이라는 장르다. 후각과 예술을 결합한 시도는 과거부터 이어져 왔다. 시작은 프랑스 파리에서 1938년 열린 초현실주의 국제전이다. 이 전시의 기획자인 마르셀 뒤샹은 전시장 한쪽에서 커피콩을 굽는 화로를 설치했다. 전시장을 커피의 주산지인 ‘브라질의 냄새’로 채운 것이다. 향을 의도적으로 기획하고 공간을 조성한 첫 시도였다. 후각은 더 이상 개인적인 감각이 아니라 공유 가능한 예술 매개체가 됐다.
향은 시대적 배경을 탐구하는 도구로도 활용된다. 2021년 네덜란드 헤이그의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에서는 ‘덧없는-색 속의 향기(Fleeting-Scents in Colour)’ 전시가 열렸다. 이 전시는 ‘그림을 볼 때 해당 장면의 냄새까지 맡을 수 있다면 작품을 다르게 경험하게 될까’라는 궁금증에서 시작했다. 방문객들은 발향 장치를 통해 깨끗한 리넨 찬장의 향기, 악취 나는 17세기 운하의 냄새 등을 경험했다. 이를 통해 단순히 향을 재현하는 것에서 나아가 17세기 사람들이 어떤 냄새 속에서 살았는지, 그 향들이 삶에서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탐색했다. 작품을 단순히 ‘보는 것’, 시각에서 ‘냄새 맡고 느끼는 것’, 오감으로 확장한 시도였다.
감정과 향을 결합하는 실험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미국 뉴욕 올팩토리 아트 켈러에서는 레이철 바필드의 ‘Shame(수치심)’이라는 향을 전시했다. 바필드는 인체 분비물을 연상시키는 향과 꽃, 머스크 향을 대비적으로 배치해 ‘나쁜 결정들’의 냄새를 표현하고자 했다. 시각적 설명 없이도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개인적인 기억과 감정을 떠올리며 향을 해석할 수 있도록 했다. 향은 한순간의 경험을 넘어, 기억과 감정에 깊이 각인되는 감각이다. 향을 통해 기억을 소환하고, 향을 통해 다른 시대를 체험한다. ‘오도라마 시티’가 보여준 것처럼 공간의 냄새는 공기의 일부가 아닌, 우리 삶의 일부다. 그리고 향은 ‘기억의 스위치를 켜는 예술’로 승화하고 있다.
호텔 들어선 순간, 바다가 펼쳐진다…'퍼퓸 매직'
시그니처 향으로 특별한 경험 선사
누군가에게 호텔은 단순한 숙소지만 어떤 이들에겐 향으로 기억되는 공간이다. 여정의 첫 도착지, 호텔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 밀려드는 향을 통해서다. 조선호텔앤리조트가 향을 브랜드의 중요한 정체성으로 삼은 이유다.조선호텔은 곳곳을 채우는 향을 단순한 향기가 아니라 ‘머무르는 경험’이 되도록 설계했다. 지역 사업장별로 시그니처 향을 발향한다. 호텔 투숙 경험을 시각과 함께 후각으로 강력하게 각인시키기 위해서다.
럭셔리 5성급 호텔인 조선팰리스 서울 강남의 ‘라스팅 임프레션’은 이름 그대로 영원히 기억에 남는 향을 지향했다. 로비부터 객실 복도까지 은은하게 스며들어 호텔의 콘셉트인 ‘당신이 가장 빛나는 순간’을 향으로 구현한다. 싱그러운 베르가모트와 재스민, 우디한 샌들우드가 어우러져 고급스러운 여운을 남긴다.
휴가지에 자리 잡은 그랜드조선 부산과 제주에는 바닷바람과 햇살을 본뜬 ‘더 모먼트’ 향을 담았다. 은은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연상시키는 선선한 향과 햇살 가득 머금은 상큼한 금귤 열매의 향, 머스크 등이 어우러져 여행의 설렘과 편안함을 구현했다. 더 모먼트는 유럽 왕실에서 사랑받아온 프랑스 조향 가문 마커스 스퍼웨이와 협업해 제작했다. 도시의 에너지를 품은 그래비티조선 서울 판교는 시그니처 향 ‘어웨이큰 트웬티’로 공간을 정의한다. 개성 있는 베르가모트 향과 청량한 그린 시트러스 향을 조합해 마치 매혹적인 숲으로 내딛는 듯한 느낌을 준다.
레스케이프호텔은 ‘라 로즈 포에지’를 통해 프랑스 감성을 극대화했다. 세계적 조향사 알리에노르 마스네가 만든 이 향은 벨 에포크 시대의 낭만을 담아 플로럴한 장미 향으로 공간을 물들인다. 24시간 발향 시스템을 가동해 호텔을 찾는 이들에게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감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호텔의 향기는 여행지에서의 추억을 되살리는 매개체가 된다. 먼 훗날 잠시 머물렀던 공간과 풍경, 그날의 동반자, 함께 써 내려간 이야기를 떠올리며 미소 지을지도 모른다.
이선아/라현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