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득의 ASEAN 돋보기] 미국 국제개발처 폐지,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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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지난 10일 미국 NBC 방송은 미국 정부의 지원 삭감으로 전 세계 결핵의 예방·진단·치료 시스템이 급속히 붕괴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트럼프 대통령의 냉정한 계산이, ‘미국 돈으로 남의 나라 도와주는 대외원조 기관’인 미국 국제개발처(USAID)의 사실상 폐지에 나서면서 전 세계적으로 결핵 환자가 늘어나며 결핵 확산 위험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결핵은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사망자를 발생시키는 감염병으로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2023년 결핵 사망자 수가 125만명에 달했다. 전 세계적으로 결핵 환자가 창궐한다면, 미국은 안전할 수 있을까? 마치 미 대륙 전체에 아이언 돔 같은 보이지 않는 보호막이라도 처져 있는 듯한 트럼프식 ‘미국 우선주의’의 단면이다.
전 세계적인 결핵 확산 문제뿐 아니라, 미국 정부의 USAID 원조 중단이 동남아 국가들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1993년 이후 미국은 125개 국가의 재래식 무기 파괴 사업에 50억 9,000만 달러(약 7조 5,000억 원)를 지원했는데 동남아에선 주로 베트남과 캄보디아, 라오스가 대상이다. 베트남을 비롯한 라오스, 캄보디아는 베트남 전쟁과 내전의 여파로 인해 심각한 불발탄과 지뢰 문제를 겪고 있는데, 베트남에는 전쟁 당시 약 1,500만 톤의 폭탄이 투하되었으며, 이 중 약 80만 톤이 불발탄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베트남 전체 면적의 약 19%에 불발탄과 지뢰가 매설된 것이며 현재까지 4만명 이상이 사망하고 6만명 이상이 심각한 부상 피해를 보았다.
인접국인 라오스와 캄보디아도 같은 상황이다. 미군은 베트남 전쟁 당시 라오스를 통과하는 월맹군의 보급 통로를 차단하기 위해 200만 톤 이상의 폭격을 가해 8천 발의 불발탄이 남았고 이에 따라 현재까지 약 5만 명이 사망하거나 다쳤다. 농업이 주산업인 라오스에서 논밭을 갈다가 터지는 불발탄 사고는 주민들의 생명과 생계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 캄보디아의 경우 베트남 전쟁 중 미군이 캄보디아에 쏟은 23만여 발 폭탄에서 나온 다수 불발탄과 1998년까지 30년간 이어진 내전 중 매설된 최대 6백만개 지뢰가 남아 있어 매년 수백명의 사상자를 내고 있는데 이에 대한 USAID의 지원은 과거 미국의 과도한 폭격 행위에 대해 ‘결자해지(結者解之)’의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작년 4월 싱가포르의 ISEAS 유소프 이삭 연구소(Yusof Ishak Institute)에서 발간한 ‘2024 동남아 현황 여론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아세안 국가들의 중국 선호도가 처음으로 미국을 앞질렀다. 설문 조사 응답자의 50.5%가 중국을, 49.5%가 미국을 선택했는데 2019년 조사 시작 이래 처음으로 중국이 미국을 앞선 결과다. 이는 라오스의 경우처럼,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과 ‘일대일로(一帶一路)’ 프로젝트를 통한 인프라 개발 지원이 중요한 요인이 된 것으로 분석된다. 또한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에 대한 미국의 親이스라엘 정책도 무슬림이 많은 동남아 지역에서 미국에 대한 불신을 가중한 결과로 보인다.
이에 반해, 지정학적 근접함과 인도적, 경제적 지원을 앞세워서 동남아 국가들을 파고드는 중국이 앞으로 트럼프 대통령 재임 기간에도 더욱 집요하게 동남아 지역에서 미국의 빈자리를 노릴 것이다. 이는 결국 對중국 강경책을 펴왔던 역대 미국 정부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돌리며, 현재 트럼프 정부의 ‘미국 우선주의’ 노선과는 반대로, 남중국해에서 ‘항행의 자유’를 내세우는 미국이 뒤로 밀릴 수 있는 나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안 그래도 동남아에선 필리핀을 제외하면 미국 편에 설 우군이 보이지 않는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비용을 줄이기 위한 미국 원조 사업 중단이, 결국 앞에서는 조금 남는 듯 하지만 뒤로는 왕창 손해보는 장사라는 것을 성공한 사업가 출신 미국 대통령이 모른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이성득 인도네시아 UNAS경영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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