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용진의 의료와 사회] 장관급 보건의료혁신위원회 법제화하라

정권 따라 의료개혁 흔들려선 안돼
초당적 논의 진행할 독립 기구 필요

권용진 서울대병원 공공진료센터 교수
의료개혁은 단순한 정책 조정이 아니다. 보건의료체계 전반의 혁신을 의미하며, 변화하는 환경에 맞춰 새로운 의료 생태계를 설계하는 일이다. 단순히 의대 정원을 늘리고 수가를 조정하는 식의 접근이 아니라 정밀한 수요 변화 예측, 의료서비스와 셀프케어의 역할 구분, 기술 진화에 따른 효율성 검토, 제조산업 인프라 점검, 간호사·의료기사·간병인력 공급체계 및 노동시장 변화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지금 정부와 여당이 추진하는 의료개혁안에는 이런 근본적인 논의가 부족하다.

뿐만 아니라 의료재정 지출 효율화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인 제네릭 약가 인하와 간납(간접 납품)업체 규제 문제는 논의조차 하지 않는다. 국민의 의료이용 책무성 강화 방안도 보이지 않는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인구 감소 지역의 의료 공급 구조 조정안이 없다는 점이다. 정부가 발표한 병원 구조 개편 계획은 정작 줄어드는 환자를 고려하지 않은 대책들뿐이다. 환자가 없는 지역에서는 병원 통폐합이 필연적이다. 통폐합이 없는 구조 개편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통폐합이 없다면 각 병원의 진료량이 적을 수밖에 없고, 환자는 1년에 몇 건의 수술만 하는 의료기관보다 더 많은 경험이 있는 대도시 병원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의료기관 통폐합과 함께 또 다른 의료개혁의 핵심은 가입자의 이용 구조 규제에 있다. 대학병원에서 암을 확진 받은 후에도 여러 병원을 재방문하는 가입자의 의료 남용은 규제해야 마땅하다. 가입자의 의료 이용을 적절히 규제하고, 특정 기능을 담당하는 의료기관과 인력에게는 충분한 보상을 해야 한다. 의료기관 통폐합 지원이나 가입자 규제 확대는 의료개혁의 주제가 되지 못한다. 예상되는 이해관계자의 저항 때문에 정치권이나 정부나 피하기 급급하다.

그러니 정권이 바뀔 때마다 지출 효율화와 의료전달체계 개편에 대해서만 새로운 개혁안이 등장하고, 정책의 지속성은 고려되지 않는다. 의료개혁이 매번 실패를 반복하는 이유다. 의료개혁이 정권의 이해관계에 따라 흔들리는 현실을 해결하려면 대통령 자문기구 수준의 의료개혁특별위원회로는 부족하다.

보건의료혁신위원회를 법제화해야 한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고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아니라 독립적인 기구에서 의료개혁을 주도해야 한다. 장관급 독립기구인 보건의료혁신위원회를 법제화할 필요가 있다. 선거관리위원회처럼 정부로부터 독립된 기구로 운영되면서 보건의료 정책을 초당적으로 논의하고,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하게 만들 법적 장치가 필요하다. 보건의료혁신위원회는 정권의 이해득실과 무관하게 의료개혁의 방향을 설정하고, 논의 결과가 입법으로 담보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현재 방식대로라면 이번 정권이 추진하는 의료개혁안은 다음 정권에서 폐기될 가능성이 크다.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도록 여야가 합의한 독립적이고 지속 가능한 의료개혁기구를 설립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핵심적인 개혁 과제들이 논의에서 배제된 채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개혁 방향이 결정되는 방식으로는 지속 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얼마를 줄일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의료체계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논의다. 정부가 아닌 독립적인 기구가 의료개혁을 주도할 때 비로소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의료개혁이 가능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