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역사다. 1999년 개봉해 극장가를 휩쓸었던 <쉬리>가 지난 19일 재개봉했다. 28년 만에 돌아온 <쉬리>는 그간 지식재산권(IP)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못한 제작사의 사정으로 재개봉이나 OTT의 콘텐츠로 활용되지 못했다. 4K로 리마스터링된 이번 재개봉은 그 시절 관객에게는 향수를, <쉬리>를 제목으로만 알고 있는 오늘날의 20~30대 관객에게는 한국 영화의 역사를 마주할 기회를 제공한다.
영화 <쉬리> 1999년 포스터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쉬리>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공식을 만들며 한국 영화 최초로 관객 500만 명을 돌파한 작품이다. 이후 <실미도>(2003)와 <태극기 휘날리며>(2004)가 문을 연 천만 관객 시대를 견인했기 때문에 한국 영화산업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영화다. 그렇기에 지금 다시 <쉬리>를 보는 것은 30여 년의 시간을 가로질러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성격과 역사를 마주하는 경험이기도 하다.그러니 두 가지로 생각해 보자. 무엇이 할리우드의 공식이고, 무엇이 한국의 성격인가. 먼저 테러를 일으키려는 집단과 이를 막으려는 특수요원의 쫓고 쫓기는 첩보 액션 서사는 할리우드의 전략이다. 당시 한국 영화는 가벼운 코미디, 최루성 멜로, 삼류 깡패들의 세계를 그린 경우가 많았는데 본격 첩보 액션이라는 장르 자체만으로도 새로운 시도였다.
<쉬리>는 당시 국내 상업영화 평균 제작비의 2배가 넘는 약 30억 원(홍보비 포함)을 투입해 스펙터클한 첩보 액션 장면을 만들었다. 대낮 도심 한가운데서 벌어지는 총격 장면, 폭탄 테러로 쇼핑몰이 파괴되고, 테러 집단이 최신형 무기를 실은 차량을 탈취하는 등 오늘날 관객에겐 액션 영화의 클리셰처럼 익숙한 설정이지만 당시엔 보기 드문 스펙터클이었다. 또 당대 최고의 스타 한석규를 비롯해 최민식, 송강호 등의 캐스팅도 대중의 관심을 모았다.
영화 <쉬리>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할리우드의 내러티브와 스펙터클, 막대한 제작비가 만들어낸 물량 공세는 이전까지 극장 최고 흥행작이었던 <타이타닉>의 기록을 뛰어넘으며 621만 관객 동원이라는 한국 영화사 전대미문의 기록을 세웠다. 말 그대로 <쉬리>는 가히 ‘블록버스터’였다. IMF 구제금융으로 어려웠던 시기, 주먹구구식으로 비슷비슷한 것만 반복하던 제작 방식에서 벗어나 한국 영화의 산업적 잠재력과 가능성을 일깨워준 사건이다.동시에 ‘한국형’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쉬리>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를 표방하면서도 한국의 정체성과 정서를 담았다. 이 영화는 테러를 저지르려는 북한 특수군단에 맞서는 비밀요원 ‘중원’(한석규)과 그의 연인 ‘명현’(김윤진)의 이야기다. 첩보 액션물에 한국인이 좋아하는 장르인 멜로드라마를 결합했다. 이 장르적 결합의 소재는 분단이라는 한국의 특수성이고, 이것은 두 주인공의 극복할 수 없는 사랑의 장애물이 된다.
영화 <쉬리>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한국전쟁과 분단이라는 소재는 과거 한국 영화에선 반공이나 한(恨)의 정서, 휴머니즘을 강조하는 내용 등으로 무겁게 다뤄졌다. 그러나 <쉬리>는 50여 년의 시간적 거리와 세대 변화에 맞춰 그 무거움에서 한걸음 물러서며 할리우드식 액션과 멜로의 소재로 녹여낸 것이다. 동시에 분단국가에서 겪는 정체성의 혼란과 한계라는 설정은 한국인이라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명현이라는 인물은 <쉬리>의 방향을 잘 보여준다. 그녀의 정체는 살인 병기로 훈련된 남파 요원 ‘이방희’다. 북한 특수부대원이라는 정체를 성형과 신분 세탁으로 숨기고 평범하게 살아간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와 연인을 향한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다 결국 슬픈 결말에 이른다. 한국 사람으로도 북한 사람으로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 연인의 머리에 총구를 겨눠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하는 관계, 명현은 분단이 만들어낸 정체성의 혼란과 한계를 표현한 인물인 것이다.
영화 <쉬리>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그 시절 <쉬리>를 극장에서 본 관객이라면 재개봉 소식에 물고기를 떠올릴 것이다. 하나는 수족관 샵을 운영하는 명현이 연인 중원에게 선물한 ‘키싱구라미’다. 키스하듯 입을 맞대곤 하는 이 물고기를 영화에서는 한 마리가 먼저 죽으면 나머지 한 마리도 죽는 습성을 가진 종으로 소개한다. 키싱구라미는 명현과 중원의 사랑과 내재된 비운을 가리킨다. 또 다른 물고기가 바로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쉬리’다. 비무장지대의 맑은 물에서만 사는 한국 토종어. 좀처럼 보기 어렵다는 이 물고기는 한국인의 바람을 담은 것일지 모른다.
영화 <쉬리>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쉬리>는 지금 봐도 분명 몰입할 수 있는 잘 만들어진 장르영화다. 아마도 이제껏 봐온 여러 편의 한국 영화와 드라마가 떠오를 것이다. 오늘날 K 콘텐츠의 마중물, <쉬리>를 다시 극장에서 확인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