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대 뒷면에서 시작된 색과 철학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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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현 국제갤러리 개인전
구순의 나이에도 변화 멈추지 않는
단색화 거장의 면모
5월 11일까지

이런 점에서 서울 소격동에서 지금 동시에 열리고 있는 하종현 화백(90)의 전시 두 개는 한국 현대미술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귀한 기회다. 지난달부터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하종현 5975’는 초기 실험적 작품세계를 돌아보는 전(前)편 격. 최근 국제갤러리에서 개막한 후(後)편 격의 전시 ‘하종현’은 그의 대표작 ‘접합’ 연작을 조명하는 전시다. 그의 접합 연작이 탄생한 배경과 그 의미, 하종현이 세계 미술계에서 높이 평가받는 이유를 정리했다.
접합, 모든 것을 잇다
때로 예술은 결핍에서 태어난다. 종이를 살 돈이 없었던 이중섭이 담배를 싸는 종이에 뾰족한 도구로 그림을 그려 은지화(銀紙畵)를 만들었던 것처럼, 하종현의 접합 연작도 가난에서 탄생했다. 시작은 1974년이었다. 15년간 실험미술의 최전선에서 주목받으며 활약하던 그였지만 여전히 형편은 넉넉지 못했다. 시장에서 파는 마대에 그림을 그리려고 시도한 것도 캔버스를 살 돈이 없어서였다. 하지만 올 사이의 구멍이 너무 커서 도저히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차라리 뒤에서부터 물감을 칠해 앞으로 밀어붙여 보자.’

이후 하종현의 접합 연작은 국내외에서 널리 인정받으며 단색화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지금 접합 연작의 가격은 점당 수억 원을 호가한다. ‘그림은 캔버스 앞면에 그리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탈피한 독창성, 단색화 특유의 절제된 아름다움, 작품에 담긴 유려한 철학이 인기의 주 요인이다.
90세에도 멈추지 않는다
여기에 더해 평생 끊임없이 변화를 꾀한 하종현의 삶이 작품의 진정성을 보증하는 ‘보증서’ 역할을 한다. 그는 접합 연작의 틀 안에서 끊임없이 작풍을 바꿔왔다. 2008년 들어 발표한 ‘이후접합’이 단적인 예다. 현란한 색(色)의 난무가 일상화된 시대를 맞아 색채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나무토막을 활용해 입체성을 더욱 강조한 연작이다. 그간 기왓장이나 백자를 연상시키는 한국적 색상을 주로 사용해온 것과 대조적이다.
하종현을 오랫동안 지켜봐온 이현숙 국제갤러리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아흔 살의 나이에도 하종현 화백의 작품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워진 것 같다.” 전시는 5월 11일까지.
※하종현의 작품세계와 국제갤러리·아트선재센터 전시 리뷰 전문은 ‘아르떼’ 매거진 11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