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운드화 무너뜨린 월가의 늑대, 달러 지키기 위해 돌아왔다 [김인엽의 매크로 디코드]

'검은 월요일' 사건 주역 베선트 美 재무장관
소로스·드러켄밀러 '파운드화 하락' 베팅에
"부동산 대출 탓에 英 기준금리 못올려" 조언

바이든 행정부, 재정 지출 급격히 늘리자
"이대로는 안돼" 트럼프 대선 지원 사격
DOGE·관세 등으로 재정 불균형 타파 나서
스콧 베선트 미 국무장관. 로이터
스콧 베선트 미 국무장관. 로이터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이 헤지펀드 출신이라는 것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조지 소로스, 스탠리 드러켄밀러 등 전설적인 투자자들과 함께 영국 파운드화를 폭락시킨 '검은 수요일' 사건의 주역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 분들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지난 19일(현지시간) 베선트 재무장관은 미국의 유명 팟캐스트 '올인'에 출연해 당시 일화를 소개했습니다. 단순히 자신의 영웅담을 늘어놓은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달러의 수호자'로 불리는 미국 재무장관이 정치에 발을 들이게 된 계기, 국채 시장에 대한 전망, 경기 침체와 미국 제조업의 향방까지 내다볼 수 있는 이야기인 만큼 소개해볼까 합니다.

당시 베선트 장관은 투자계의 전설 '조지 소로스'가 이끄는 퀀텀펀드에서 영국 애널리스트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거물 스탠리 드러켄밀러가 포트폴리오 매니저로 근무했습니다.
조지 소로스 소로스펀드매니지먼트 회장
조지 소로스 소로스펀드매니지먼트 회장
스탠리 드러켄밀러 듀케인 패밀리 오피스 회장
스탠리 드러켄밀러 듀케인 패밀리 오피스 회장
소로스는 1992년께 '파운드화 매도 베팅'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영국은 유럽 경제권에 편입하기 위한 절차 중 하나로 '유럽환율메커니즘(ERM)'에 가입해있었습니다. ERM은 영국 1파운드를 독일 2.95마르크로 교환하도록 하는 일종의 고정환율제도였습니다.

소로스는 이러한 고정환율제에 틈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마르크화 대비 파운드화가 과대평가 됐다는 것입니다. 당시 독일은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동독 지역을 개발하기 위해 천문학적 투자를 단행했습니다. 급격히 유동성이 늘어나자 분데스방크(독일 중앙은행)는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2년 간 10여차례 기준금리를 인상했습니다. 반면 같은 기간 영란은행은 기준금리를 낮췄습니다. 실업률이 상승하고 투자가 감소하는 등 불황의 조짐이 나타났기 때문이었습니다.
1990년대부터 기준금리를 높인 독일과 낮춘 영국. Fed
글로벌 자금이 독일로 쏠리고 있던 상황이었스니다. 영국은 고정환율을 유지하기 위해 파운드화를 매입할 수밖에 없다고 소로스는 판단했습니다. 영국의 외환보유고가 바닥나면 파운드화 하락은 걷잡을 수 없고 파운드화 공매도를 통해 상당한 차익을 거둘 것이라는 계산이었습니다.

이 베팅에 결정적인 조언을 한 사람이 바로 베선트 장관이었습니다. 그는 영국 모기지(주택담보대출)가 대부분 변동금리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이 기준금리를 높이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영국에 파운드화 매도세를 꺾을 무기가 없다고 판단한 겁니다. 드러켄밀러가 이러한 아이디어에 기반한 투자 계획을 제출하자, 소로스는 "확실한 투자면 왜 세 배로 하지 않겠느냐"며 판돈을 키웠다고 베선트 장관은 회고했습니다.

결국 영국은 퀀텀펀드의 100억달러를 포함해 각 헤지펀드의 1100억달러 규모의 매도세를 버티지 못하고 ERM 탈퇴를 선언했습니다. 퀀텀펀드는 이 거래로 약 20%의 수익을 거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는 이른바 '채권 자경단'의 시초로 평가됩니다. 이후 수많은 헤지펀드들이 특정 국가의 정부 재정·통화 정책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그 국채를 매도해 영향력을 행사하게 됐습니다.

베선트 장관은 자신이 트럼프 대통령의 선거를 돕게 된 이유도 전임 조 바이든 대통령의 재정 정책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바이든 행정부에서) 끝도 없는 지출이 발생했다"라며 "우리가 계속 지출을 늘리고, 늘리고 또 늘리면 결국에는 세금을 인상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고 벗어날 수 없는 균형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미국 국가부채가 계속 늘어나면 '채권 자경단'의 그림자가 끊임없이 어른거리고, 미국 역시 달러 공격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원조 자경단' 베선트 장관은 누구보다 잘 알지 않을까요.
증가하는 미국 연방정부 부채(GDP 대비 %). Fed
바이든 행정부 시기 미국은 코로나19 팬데믹 대응,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반도체지원법 등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입했습니다. 미국 국내총생산(GDP)에서 정부 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2020년 30.69%로 2차세계대전 당시인 1943~1945년을 제외하고 최대치였습니다. 이 해 GDP 대비 미국 공공부채 비율도 132.81%로 사상 최고 수준을 기록했습니다.

베선트 장관은 지난 5년 간 연평균 -8.46%로 떨어진 GDP 대비 재정적자율을 -3%까지 줄이겠다는 입장입니다. 베선트 장관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 "정부 지출 삭감과 과도한 노동력 감축(공무원 감원), 금융 규제 완화를 시행하겠다"고 했습니다.

"월스트리트보다 메인스트리트가 중요하다"는 베선트 장관의 입장도 이러한 태도의 연장선산으로 보입니다. 정부 지출의 급증으로 급등한 주식시장을 지키기보다는 실물경제를 중요시하겠다는 것입니다. 베선트 장관은 바이든 행정부 시기 경제 상황에 대해 "상위 10%에 속해있었다면 증시가 급등했겠지만, 하위 50%에 속한다고 생각해보라. 신용카드(원리금)는 올라가고, 모기지는 너무 비싸 집을 살 수 없고, 아메리칸 드림은 정말 끝났다. 자산은 없고 부채만 남은 상황"이라고 비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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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엽 기자 insid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