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숨 쉰다, 친절한 커피향처럼

[arte] 조원진의 공간의 감각

죽어가는 도시 속
커피 한 잔이 주는 환대

은평구 신사동 '파브스 커피'
파브스 커피 / 사진. ⓒ조원진
파브스 커피 / 사진. ⓒ조원진
건축가들은 각자 이상을 품고 도시를 설계했다. 그 이상향은 각각의 방식으로 실현되어 세계 곳곳에 도시를 만들었다. 하지만 계획 속의 건물과 도로는 마치 숨 쉬는 생명체와 같아 태초의 설계와 다르게 변화하곤 했다. 도시 구성원들은 의도치 않은 접촉과 커뮤니케이션이 반복한다. 자본이 유입되고 부동산 가치 향상을 위한 욕심이 쏟아지면 부작용으로 도시의 일부가 슬럼화 되기도 한다. 미래를 내다볼 수 없는, 자신이 설계한 건축물보다 오래 남지 못하는 건축가들의 숙명은 도시의 운명을 알 수 없는 곳으로 내몬다.
파브스 커피 / 사진. ⓒ조원진
파브스 커피 / 사진. ⓒ조원진
제인 제이콥스는 유기적인 생명체와도 같은 도시의 성격을 무시한 채 진행되는 도시 개발에 분개한다. 그는 저서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을 통해 편향된 사고가 바탕이 된 도시 개발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대체로 많은 도시계획은 지구의 역할을 한정해 구획을 나눠왔다. 종종 미적인 감각에 의해 도시를 조형하는 경우도 있다. 제인 제이콥스는 이런 식의 접근이 오히려 특정 지역의 슬럼화를 부추긴다고 지적한다.

도시 계획에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공간의 시차를 없애고 다양성을 포용하는 일이다. 낯선 사람들을 가려내고 구분해 내는 일은 그들에게 적개심만을 일으킬 뿐이다. “도시라는 의미의 공중 생활은 없고, 각기 정도가 다른 사생활의 연장만 있다”(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 p. 99)면 도시의 치안은 악화될 수밖에 없다.

용도와 연식이 각기 다른 건물이 가로를 채우고 그곳에 모든 시간대에 걸쳐 사람들이 거닌다면, 인위적인 계획이 없어도 상호 간의 자연스러운 감시를 끌어낼 수 있다. 낯선 사람을 배척하기보다 친절로 맞는다면 범죄를 예방하기도 용이할 것이며, 슬럼화도 효율적으로 막을 수 있게 된다. 시대를 내다본 제인 제이콥스의 주장은 훗날 도시 계획에 근간을 이루는 CPTED(범죄예방환경설계)의 원형이 되기도 한다.

미국 대도시의 죽어가는 모습이 그려지고 60년이 흐른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는 같은 위기를 마주하고 있다. “계획된 방식으로 수용되기 위해 가격표가 붙여지며, 가격표가 붙여진 채 분류된 각각의 인구 집단은 자신들을 에워싼 도시에 대해 의심과 불안을 키우며 살아간다.”(같은 책, p.21) 외부와의 차단을 강화하는 시스템은 대단지 아파트 입주민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파브스 커피 / 사진. ⓒ조원진
파브스 커피 / 사진. ⓒ조원진
아침 식사부터 여가 활동까지 책임지는 커뮤니티 센터의 만능화는 단지 밖에서 이뤄지는 공중 생활의 분해를 유발한다. 장벽은 부동산 가격에 비례할수록 더 높아지고 견고해진다. 단지 밖 낯선 사람들은 장벽이 만드는 불친절과 소외에 익숙해지고 있다. 서로에 대한 공적인 책임이 분해되는 사회에서, 단지를 거니는 아이들은 “도시 보도의 평범한 어른을 통해”(같은 책, p.123) 세상의 모습을 배울 수 없다.

낯선 이에 대한 친절은 파브스 커피의 신정주, 이준선 대표를 커피의 세계로 이끌었다. 파브스 커피의 탄생은 웨스트버지니아 모건타운에 위치한 카페 ‘더 그라인드(The Grind)’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준선의 유학길에 동행한 신정주는 남편이 학교에 간 사이 더 그라인드에서 일을 도왔다. 이방인이었던 자신을 보듬어준 곳이자, 동네의 모든 사람이 한데 모이는 사랑방 같은 카페였다.
파브스 커피 / 사진. ⓒ조원진
어떤 손님은 카페 메뉴에도 없는 콜라를 마시러 이 카페에 들렀는데, 상점에서 파는 가격보다 돈을 더 주고라도 컨트리 음악이 흐르는 유쾌한 이곳의 분위기를 즐기기 위함이었다. 카페에서는 그 누구도 이방인이 아니었다. 낯선 곳에서의 지루함과 외로움을 달랜 이곳에서의 기억은 신정주에게 언젠가 카페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심어줬다.

카페는 부부가 함께 달릴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20대를 토목공학 수자원 연구를 해온 이준선은 웨스트버지니아의 생활에 이어 미네소타에서의 박사과정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부부는 박사과정이 시작되면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같이 해도 행복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카페 운영을 택했다.

그렇게 이준선의 연구 대상은 ‘하천의 흐름’에서 ‘커피 로스팅’으로 바뀌었고, 신정주의 일터는 모건타운에서 은평구 신사동으로 바뀌었다. 인생의 경로를 바꾸는 일이었던 만큼 둘은 신중했다. 후보로 선정된 카페 오픈 장소를 여러 차례 방문했고, 카페가 문을 연 지금의 장소 앞에서는 일주일간 유동 인구를 체크하기도 했다.
파브스 커피 / 사진. ⓒ조원진
불광천 인근의 신사동 골목은 재개발을 앞두고 음침한 분위기가 더러 존재했다. 일부는 이미 아파트 단지 건설 진행되고 있었고, 재개발이 확정되며 이주를 시작한 지구도 있었다. 어둑하고 쓸쓸한 거리에 슬럼화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부부는 이곳을 빗겨나 재개발에 대한 협상이 정체된 골목에 파브스 커피를 열었다. 예산이 부족해 상권에 대한 선택지도 없을뿐더러, 인테리어에도 큰돈을 쓸 수 없어 두 사람이 대부분의 작업을 직접 진행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가장 큰 무기인 ‘낯선 이들에 대한 환대’가 준비돼 있었다. 주거 밀집 지역이라는 특성상 시간대별 유동 인구 격차가 컸지만, 카페에 단골손님이 늘어나니 그 격차는 점차 줄어들었다. 덩달아 오래된 가게들에도 활기가 돌았다. 낯선 사람들이 거리의 빈 시간과 공간을 채운 덕분이었다. 구청에서는 긍정적인 변화를 포착해 주거환경개선 예산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가게도 문을 열어 거리에 열기를 더하자, 계절과 시절에 상관없이 거리가 북적였다.
파브스 커피 / 사진. ⓒ조원진
카페는 낯선 이를 환대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럽고도 편안한 창구다.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만들어지는 마주침은 도시에 윤활유가 된다. 제인 제이콥스는 더 많은 우연한 마주침을 위해 짧은 블록이 이어진 거리의 설계를 강조한다. 마주침으로 만들어지는 시선의 교환은 일방적인 CCTV의 감시보다 따뜻한 지역사회의 보호막이 된다. 울타리를 세운 아동 보호 시설보다 우연한 마주침을 늘린 거리에서 아이들은 “성공적인 도시 생활의 기본 원리”(같은 책, p.123)를 배운다.

오래된 동네의 흔적을 전부 지우고 낯선 사람들을 몰아내는 지금의 재건축 시스템은 과연 우리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고 있을까? 부동산 가치에 매몰된 사람들은 자산을 지키기 위한 담장을 더 높게 세우고 싶어 한다. 생명처럼 숨 쉬는 도시는 누군가의 일괄적인 계획으로, 특정인들을 자산을 보호하기 위한 구획으로 갈라지며 조금씩 망가진다. 지금이라도 빗장을 풀고 낯선 이의 발걸음을 반긴다면, 어느 건축가나 도시 계획가의 이상향처럼 여겨진 평화로운 도시의 모습이 꽃을 피울 것이다. 어느 주말 한낮의 파브스 커피에 모인 사람들이 커피를 즐기는 모습과 같이.
파브스 커피 / 사진. ⓒ조원진
조원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