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서 마주친 털북숭이 괴물…어릴적 트라우마와 만나다

이미주 개인전 '탐구생활: 숨겨진 실타래'
서울 논현동 서정아트에서 4월 30일까지

고교 시절 트라우마였던 하얀 설인 캐릭터
회화와 조각 등으로 제작하며 정면 돌파
이미주 작가(43)가 처음 설인을 만난 건 고등학생 때 일이다. 교내 전생 체험 행사에 참여한 작가는 그날 밤 꿈을 꿨다고 한다. 18세 소녀는 당시 그의 나이 개수만큼의 계단을 차례로 내려갔다. 축축한 흙바닥에 발을 디딘 찰나. 작가는 어느새 흰색 털로 뒤덮인 자기 손을 발견했다.

소름 돋은 작가는 꿈에서 번쩍 깼다고 한다. 스트레스가 심한 날이면 설인이 나오는 악몽에 시달렸다. 흉한 몰골의 털북숭이 괴물은 사춘기 소녀의 치부를 모아놓은 것 같았다. 홍익대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한 뒤 스페인 유학길에 오르고, 이후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면서도 작가는 설인을 마음 한편에 숨겼다.
작가가 감춰온 내면의 설인이 캔버스에 출몰했다. 서울 논현동 서정아트에서 열린 그의 개인전 '탐구생활: 숨겨진 실타래'에서다. 설인과 버섯, 물 등 작가의 여러 자아를 상징하는 아기자기한 캐릭터를 중심으로 회화와 조각 20여점이 걸렸다. "설인을 계속 숨기면 평생 트라우마로 남을 것 같았습니다. 내면의 부끄러움과 속 시원하게 대면하기로 했죠. 막상 작품으로 만들고 나니까 걱정만큼 보기 흉하지 않더라고요."

20여년을 함께한 설인은 작가의 내면을 비추는 일종의 페르소나다. 전업 작가 생활을 시작한 2011년 무렵부터 마음속 설인의 이미지를 꺼내기 시작했다. 작은 도자기 작품으로 시작된 설인 캐릭터는 점차 조각과 회화로 확장했다. 작가는 "그동안 설인은 작품 구석에 수줍게 등장하곤 했다"며 "주인공으로 전면에 내세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이미주, 'Yeti with growing fungis'(2025). /서정아트 제공
이미주, 'Yeti with growing fungis'(2025). /서정아트 제공
입구에 놓인 네 점의 설치작업에서 전시는 시작한다. 무엇인가 오래 기다려서 충혈된 듯한 눈알 한 쌍이 놓였다. 망부석처럼 돌이 된 채 발만 삐죽 나온 조각도 나와 있다. 일러스트레이터 출신인 작가 특유의 간결한 형태와 쨍한 색감이 돋보인다.

이번 신작은 한 소녀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소녀는 설인의 손을 이끌고 세상으로 나아간다. 무의식에 빠져들듯 물에 얼굴을 반쯤 담그거나, 완전히 잠수해서 헤엄치기도 한다. 물과 설인, 버섯 등 음의 이미지를 가진 대상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작가는 이들을 어둡지 않게 묘사했다. 작가는 "설인은 내성적이지만 강하고, 버섯은 어두운 곳에서도 금세 자란다"고 설명했다.
전시 제목은 초등학생이 방학 기간에 스스로 학습하도록 배포한 '탐구생활' 교재에서 따왔다. 몇몇 작품은 작가의 아이디어를 두서없이 기록한 습작 노트를 연상케도 한다. 낙서처럼 이모티콘을 구석구석에 그려 넣고, 스프레이를 흩뿌리거나 다양한 패턴을 입히는 등 실험적인 시도가 이를 보여준다.

전시는 4월 30일까지.

안시욱 기자
서울 논현동 서정아트 서울에서 열린 이미주 개인전 '숨겨진 실타래' 전시 전경. /서정아트 제공
'숨겨진 실타래' 개인전을 연 이미주 작가. /서정아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