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우리 지구 푸르게 푸르게

최호정 서울시의회 의장
행정사무 감사의 계절이 다가오면 서울시의회는 양손에 분홍색 보따리를 쥔 사람으로 넘쳐난다.

15년 전, 초선 서울시의원으로 그 수상한 ‘분홍보자기’를 처음 마주했을 때 나는 영락없이 떡집 보자기인 줄 알았다. 그러나 분홍보자기 속에 들어있는 건 떡이 아니라 방대한 문서였다. 서울시와 서울교육청의 한 해 살림을 점검하기 위해 검토해야 할 어마어마한 양의 문서가 보자기에 가득했다. 상당한 양의 출력물을 운반하기엔 보자기만 한 게 없었다.

비단 행정사무 감사 때만이 아니다. 서울시의회는 매일이 종이와의 전쟁이다. 보고를 받을 때도, 회의를 할 때도 언제나 종이가 따라온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15년 가까이 당연하게 지켜봐 온 그 장면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 순간이.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친환경 조례를 논의하기 위해 수십, 수백 장의 종이를 써서 회의자료를 만들고, 인공지능(AI)시대 스마트 의정 혁신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일일이 책장을 넘겨 정보를 살피는 모순된 현실이 불편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지난해 말 신년 계획을 세우며 우리 의회도 종이 문서를 조금이라도 줄여보자고 제안했다.

우려도 있었다. 일에도 관성이 있다. 하던 일을 더 하는 건 자연스러워도 하던 일을 덜 하거나 안 하려면 부담이 따른다. 일의 뺄셈에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일단 당연하게 해오던 일들을 낯설게 살피며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보자고 결정했다.

의회 사무처 각 부서의 종이 사용 현황을 조사했다. 그리고 당장 줄일 수 있는 분량이 어느 정도인지 살폈다. 의원수첩은 모바일로, 매년 발행하던 법규집은 격년제로 바꾸기로 하는 등 절감 계획을 통해 올해만 인쇄물 8000부, A4용지 29만 장을 줄이는 계획을 세웠다. 집행기관에서 제출하는 행정사무 감사 자료도 출력물을 최소화해 전년 대비 50% 줄일 계획이다.

이런 계획의 첫 실현으로 2025년도 첫 임시회 본회의장에선 아예 종이가 자취를 감췄다. 수백, 수천 장에 달하는 연간 업무보고를 인쇄물 대신 파일로 받아 모니터로 송출했다.

트럭 한 대 분량의 종이를 빼니 8200만원의 예산이 더해졌다. 더 귀중한 것도 보태졌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지속 가능한 서울의 미래’다.

기억하는가. 나무를 베어 위생용 종이 제품을 만드는 유한킴벌리가 40여 년 전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 캠페인을 처음 시작했을 때 많은 이는 의문을 품었다고 한다. 지금은 어떤가. 40년간 심은 나무만 5700만 그루. 묘목은 자라 풍성한 숲을 이뤘다.

나는 믿는다. 종이 한 장을 덜어내는 그 작은 결단이 언젠가 큰 결실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종이 없는 서울시의회’의 시작이 우리 지구를 푸르게 푸르게 하는 데 기여하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