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企 "키코 손실 물어내라" VS 은행 "배상땐 배임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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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코'분쟁 재점화…기업 4곳, 시중은행에 소송 추진방송용 셋톱박스 개발기업 원글로벌미디어는 2007년 최대 수출 실적을 달성하며 국무총리상을 받았다. 신용등급 AAA이던 이 회사는 2008년 신한은행의 권유로 환율변동 위험에 대비하는 통화옵션 상품 키코(KIKO)에 가입하면서 고꾸라졌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원·달러 환율이 1450원 이상으로 급등하자 순식간에 300억원 넘는 손실이 발생해서다. 이 손실을 메우기 위해 원글로벌미디어는 연 12%가 넘는 금리로 대출을 받았으나 원리금 상환 부담을 이기지 못해 2016년 3월 끝내 폐업했다.
대법, 2013년 '은행 무죄' 확정
금감원, 6년 뒤 다시 배상 권고
구속력 없어…은행·기업 '혼란'
수백억원 손해본 중소기업들
금감원 권고안 근거로 소송 돌입
은행 "채권 소멸시효 이미 지나"
◇피해 기업 “명백한 불완전 판매”
이번 소송에 나선 4개 기업은 2019년 금감원이 키코 계약을 불완전 판매라고 명백하게 규정한 만큼 강제 규정이 없더라도 손해액을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금감원이 배상 결정의 핵심 근거로 인용한 대법원 판례에서도 “통화옵션 계약을 적극적으로 권유하는 행위는 적합성의 원칙을 위반해 고객에 대한 보호 의무를 저버리는 불법행위”라고 규정했다. 황택 키코공동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은 “건실하게 성장하던 수많은 기업이 키코 사기로 한순간에 공중 분해됐다”며 “금감원의 결정대로 은행들이 피해액의 일부라도 반드시 배상해야 한다”고 말했다.키코 사태가 터진 건 2008년이다. 14개 시중은행과 키코를 계약한 중소기업은 980여 곳에 이른다. 매출이 4500억원 선이던 J사는 키코로 1000억원 가까운 손실액이 발생하면서 이를 메우기 위해 계열사 네 곳을 팔아야 했다.
키코는 약정기간 원·달러 환율이 떨어질 때(knock-out) 기업의 풋옵션을 통해 은행이 손실을 메워주고, 환율이 오를 땐(knock-in) 은행의 콜옵션을 통해 기업이 은행에 외화를 시세보다 싸게 팔아야 해 기업이 손해를 보는 조건으로 설계된 파생상품이다. 2008년 2월 달러당 937원30전이던 원화는 그해 11월 1482원70전으로 치솟으며 수많은 기업이 도산하는 등 막대한 손실을 봤다. 조붕구 전 키코공대위원장은 “풋옵션과 콜옵션의 배율부터 2배가 넘는 비대칭 구조고, 은행이 제대로 고지하지 않은 불공정 계약인데도 안전한 환헤지 상품이라며 기망행위를 했다”고 비판했다.
◇은행 “사법부 판단 끝난 사안”
은행들은 2013년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된 키코 사태를 이유로 중소기업들이 다시 소송을 제기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금감원이 2019년 12월 시중은행에 기업별 손해액의 15~41%를 배상하라고 했지만, 이는 구속력 없는 권고일 뿐 앞서 나온 대법원의 무죄 판결 효력이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이다.특히 은행들은 대법원의 무죄 판결에도 불구하고 금감원의 배상안을 수용하면 배임에 해당할 수 있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민법상 손해배상청구권 소멸시효(10년)도 이미 지났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소송을 제기하는 기업 중 일부는 키코에 가입하기 위해 은행권에 경쟁입찰을 부쳤을 정도로 키코 상품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어 도저히 불완전 판매로 볼 수 없다”고 했다.
은행들은 또 키코 분쟁이 지속되는 원인으로 금감원의 무리한 시장 개입을 꼽고 있다. 금감원은 대법원의 무죄 판결이 나온 2013년 이후 6년이 지난 2019년 돌연 키코 사태 분쟁조정에 나서 배상안을 마련했다.
이정선 중기선임/정의진 기자 leewa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