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어르신 업고 방파제로 피신…괴물산불, 상상 못할 정도로 빨라"

의성 대형산불 엿새째…경북 북부 초토화

영덕 해안가 마을 피해 속출
영양 4명 등 사망자 모두 노인
차 타고 대피하다 도로서 참변도
재난문자 혼선·뒷북대응에 분통
통신장애로 대피령 못 받기도
식품공장 등 기업 피해 잇따라
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살기 위해 방파제 쪽으로 무조건 뛰었어요. 10분만 늦었어도 화마에 휩싸였을 겁니다.”

26일 오전 경북 영덕군 축산면의 임시대피소. 구급차와 소방차, 불에 탄 트럭이 뒤엉켜 있는 좁은 골목 사이에 자리한 마을회관 임시대피소엔 두꺼운 외투와 담요로 몸을 감싼 주민들이 모여 있었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주민들은 화염에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캐한 연기까지 마을로 내려와 어쩔 수 없이 바다를 택했다고 입을 모았다.

김필경 경정3리 마을이장(55)은 전날 밤 대피소로 향하기 위해 마을 재실에 모여 있다가 갑작스레 불길이 덮치자 젊은 주민들과 함께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의 집을 찾아 업고 차량으로 대피시켰다. 그는 “당시 빠르게 방파제로 피신하지 않았다면 30~40명의 주민이 희생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날 밤부터 이날 새벽까지 영덕 석리항·축산항·경정3리항 방파제로 피신한 주민 100여 명이 구조돼 배를 타고 축산면 대피소로 이동했다. 축산면에 거주하는 신모씨(48)는 “대피하라는 문자는 받았지만 불길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빠르게 덮쳤다”며 “동네 전체가 화마에 휩싸여 어르신들을 모시고 무작정 바닷가로 뛰어나갔다”고 말했다.

화마가 덮친 안동과 영양·청송에서도 “사람이 쓰러져 있다”는 신고가 속출했다. 산불 현장 곳곳에서 대피하던 주민들이 불길에 휩싸였고, 가족을 구하러 간 일가족이 연기에 질식하면서 함께 변을 당하기도 했다.
< 삶의 터전 송두리째 잃은 주민들  >   26일 경북 영양군 군민회관 대피소에서 산불을 피해 모여든 주민들이 몸을 누이고 휴식을 취하고 있다. 영양군 산불로 인한 대피자는 980명에 달한다.   /연합뉴스
< 삶의 터전 송두리째 잃은 주민들 > 26일 경북 영양군 군민회관 대피소에서 산불을 피해 모여든 주민들이 몸을 누이고 휴식을 취하고 있다. 영양군 산불로 인한 대피자는 980명에 달한다. /연합뉴스
이날 영덕군은 산불로 군 면적의 27%에 달하는 2만㏊가 불에 탔다고 밝혔다. 군 전 지역에서 통신장애까지 발생해 피해가 커졌다. 대피령을 제때 확인하지 못한 주민이 적지 않았다. 군 관계자는 “청송군에서 산불이 넘어왔는데 이날 새벽 2시께 해안 지역까지 불이 빠르게 확산됐다”고 말했다.

사망자 대부분은 고령자다. 스스로 대피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갑작스러운 화염에 휩싸이거나, 차를 타고 대피하다 도로에서 참변을 당했다. 영양 석보면에서는 한꺼번에 4명의 시신이 발견됐다. 모두 불길을 피해 뛰쳐나오다 연기에 질식하거나 쓰러진 것으로 전해졌다. 울주 언양에선 실버타운 입소자들이 타고 있던 차량이 폭발해 3명이 사망했다.

당국의 미흡한 재난 대응 체계에 대한 비판도 커지고 있다. 늦은 대피 지시나 안내 혼선으로 피해를 키웠다는 것이다. 청송군에서는 대피 장소가 네 번이나 바뀌고 재난문자조차 5시간 넘게 발송되지 않아 주민들이 갈피를 잡지 못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청송군 주왕산국립공원 인근에 거주하는 김모씨는 “화염이 번지는데도 어느 방향이 안전하다거나 어느 방향이 위험하다는 안내조차 없었다”며 “빨리 대피하라고만 하니 밖으로 나왔다”고 말했다.

산불은 인명 피해뿐 아니라 지역 기업과 생산 공장에도 피해를 입혔다. 안동 일직면에서는 연 매출 100억원 규모의 육가공 업체 공장과 1만㎡ 규모의 대형 식품회사 공장 등이 모두 소실됐다. 이번 화재로 임시대피소를 찾은 피난민도 2만3000명을 넘어섰다. 대피소엔 전국 각지에서 보낸 생필품과 식사, 담요 등 구호품이 쇄도하고 있다.

권용훈 기자/영덕=오경묵 기자 fac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