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바이오 뉴프런티어 (5)] 에비드넷 "병원마다 쌓인 의료 빅데이터 플랫폼 구축…신약개발·의료 패러다임 바꾼다"

조인산 대표 인터뷰

국내 60여개 병원과 연계
병원 의료 데이터 분산망 구축
병원 연구자간 데이터 공유
제약사 등에는 분석 데이터 제공

맞춤형 진료, 신약 개발에 활용
미국 등에선 의료 분산데이터 플랫폼 성업중

에비드넷, 내년 매출 50억원 목표
질병 예측 등으로 서비스 확장 중
조인산 에비드넷 대표는 의료 분산데이터 플랫폼을 구축해 정밀의료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 사진=에비드넷 제공
조인산 에비드넷 대표는 의료 분산데이터 플랫폼을 구축해 정밀의료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 사진=에비드넷 제공
"환자의 유전체 정보, 의료 빅데이터를 의료기관과 제약사 등에 제공해 개인 맞춤형 환자 치료가 이뤄지는 정밀의료 시대를 열어가겠습니다."

조인산 에비드넷 대표는 최근 서울 양재동 본사에서 인터뷰를 갖고 이같이 말했다. 올해로 설립 8년차인 에비드넷의 비전은 '데이터로 세상을 건강하게'다. 의료 빅데이터와 인공지능(AI) 기술을 기반으로 의료 비효율을 없애고, 인류의 건강을 증진시키는 헬스케어 기업이 되겠다는 취지다.

에비드넷은 의료 분산데이터 플랫폼의 국내 선두 주자다. 여러 의료기관에 산재해 있는 환자 의료 데이터를 외부 반출 없이 분석한 뒤 환자 진료는 물론 신약 개발에 유용한 정보를 추출해준다. 정밀의료 인프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에비드넷은 글로벌 의료 빅데이터 플랫폼으로 도약한다는 비전도 갖고 있다. 일본 대만 등 아시아권을 1차 공략 시장으로 잡고 있다.


'규제 텃밭' 의료 데이터에서 길을 찾다

조 대표는 의과학자다. 서울대 기계항공학부와 중앙대 의대를 나왔다. 성균관대 삼성융합의과학원에서는 임상 데이터 연구를 하며 석박사 과정을 밟았다. 보톡스, 필러가 아직 대중화되지 않았던 2011년 미국 보툴리눔 톡신 업체 앨러간에서 학술부장을 맡아 바이오 업계와 인연을 맺었다. 그러다 2014년 1월 한미약품 투자담당 임원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정밀의료에 눈을 떴다.

조 대표는 "바이오 혁신기술을 발굴하고 투자하는 업무 외에도 작고한 임성기 한미약품 회장이 꿈꾸던 그룹 미래 사업의 밑그림을 그리는 일도 했다"며 "그때 찾은 사업 아이템이 정밀의료였다"고 했다.

정밀의료는 환자의 유전 정보, 환경, 생활습관 등을 고려한 맞춤형 치료다. 모든 환자에게 똑같이 적용했던 기존의 치료 방식이 개인별 최적의 치료로 바뀐다는 걸 의미한다. 유전체 분석, 빅데이터, AI가 바꾸고 있는 의료 패러다임 시프트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 바로 데이터다.

2017년 11월 에비드넷을 설립한 조 대표는 병원에 산재해있는 의료 데이터를 모아서 활용할 수 있는 플랫폼 구축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출발부터 가시밭길이었다. 규제와 편견 때문이었다.

병원에 쌓인 전자의무기록(EMR)을 활용하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용어 표준화가 되어 있지 않은데다 병원간 교류가 사실상 단절돼 있어서다. 국내 병원의 EMR 구축율은 92%로 높지만 연구 등의 목적 보다는 건강보험 청구용으로 쓰였다. 의료 정보 교류에 대한 인식이 낮기도 했다.

개인정보보호법, 정보통신망법, 신용정보법 등 데이터 3법은 의료 정보 활용을 막는 '대못 규제'였다. 다행히 2020년 1월 환자 동의 없이 연구개발(R&D), 시장분석 등에 제한적으로 가명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하지만 여전히 가명정보를 제3자에게 제공하려면 병원마다 데이터심의위원회와 기관생명윤리위원회 심의를 별도로 받아야 했다. 2021년 규제샌드박스 심의위원회가 분산데이터망을 통해 얻은 통계치는 예외 대상이라고 결론내고 나서야 에비드넷은 숨통을 트게 됐다.

조 대표는 "AI를 통해 표준화되지 않은 의료 용어를 재정리하고, 분석에 필요한 데이터를 추출할 수 있도록 플랫폼을 개발했다"며 "그동안 버려져왔던 병원 의료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정밀의료가 국내서도 이뤄질 수 있는 출발점이 됐다"고 했다.


'국내 선두' 의료 분산데이터 플랫폼

에비드넷은 '피더넷'이라는 독자적인 의료 분산데이터 플랫폼을 가동 중이다. 국내 60여개 병원이 연결된 국내 최대 규모 민간 플랫폼이다.

국내 '빅 5' 병원들이 대형 정보기술(IT)업체들과 손잡고 의료 빅데이터 플랫폼을 구축했지만 내부용에 그쳐 확장성을 갖지 못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정부 국책과제로 추진됐던 프로젝트들도 대부분 사업화 등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내 현실에 맞는 의료 데이터 분산망 구축이 수월치 않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조 대표는 "국내서 의료 데이터 분산망을 구축한 곳이 에비드넷과 카카오헬스케어에 불과하다"며 "의료 서비스의 대부분을 민간에서 제공하는 시스템과 각종 규제 등이 발목을 잡고 있다"고 했다.

에비드넷이 다루는 핵심 데이터는 RWD(Real World Data, 실제 임상 데이터)다. 개별 병원에 쌓인 전자의무기록(EMR), 건강보험 청구 데이터 같은 원본 데이터다. 익명 처리된 RWD를 취합한 뒤 연구분석에 필요한 데이터를 추출하고 표준화 작업을 거쳐서 얻는 게 CDM(Common Data Model, 공통데이터모델)이다. CDM은 제약사 보험사 등의 비즈니스 의사결정, 다기관 연구를 위한 임상, 여러 종류의 질환 환자 탐색 등에 활용된다.

조 대표는 "지금까지 병원 연구자들은 자신이 소속된 병원 데이터만 주로 썼지만 피더넷에 참여하는 60여개 병원 연구자들은 참여 병원의 데이터를 모두 손쉽게 활용할 수 있다"며 "최근들어 관련 연구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는 추세"라고 했다.


임상시험·의료연구 '룰'을 바꾸다

에비드넷의 또다른 주요 사업은 RWE(Real World Evidence, 실제 임상 근거) 서비스다. RWD를 분석해 도출한 임상적·과학적 근거가 되는 데이터다. 국내 제약사는 물론 글로벌 빅파마들도 에비드넷의 고객사다.

조 대표는 "제약·바이오기업들이 신약 승인이나 약물재평가, 치료효과 검증 등에 RWE를 활용할 수 있다"며 "화이자 등 글로벌 빅파마에는 관련 직원만 수백명에 이를 정도로 중요한 업무로 취급받고 있다"고 했다.

에비드넷은 시장현황 분석은 물론 연구를 위한 프로토콜 개발, 데이터 분석, 논문작성 지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요로상피암 환자에서 신보조항암요법과 보조항암요법의 생존율 비교 연구 △고지혈증 치료제의 당뇨병 발생 위험률 연구 △암환자 치료 기간별 항암치료 패턴 및 비용 분석 연구 등이 제약사들이 요청하는 항목들이다.

제약사들이 RWE에 주목하는 이유는 연구개발 시간과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어서다. 제약사가 병원에 흩어진 의료 데이터를 활용하려면 제약사마다 개별 병원에 기관생명윤리위원회 등의 심의를 일일이 거쳐야 했다. 시간과 노력이 적잖이 소요되는 일이다. 조 대표는 "제약사 등이 필요로 하는 데이터 분석을 자동화하고 플랫폼화한 덕분에 수요가 갈수록 늘고 있다"고 했다.

RWE 활용은 글로벌 추세이기도 하다. 기존 데이터를 잘 활용하면 불필요하게 임상시험에 참여하는 환자를 줄일 수 있고, 임상시험 기간도 단축할 수 있어서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2018년부터 매년 RWE 가이드라인을 내놓으며 제약사들의 활용을 권장하고 있다. 암젠의 이중항체 면역항암제인 블린사이토 임상 때 환자모집이 어려운 현실을 감안해 대조군을 면제해주기도 했다. 대조군 의약품은 이미 환자 치료에 쓰이고 있어 임상 데이터가 나와 있기 때문이다.

한국 식품의약품안전처도 2018년 RWE 사례집을 공개하고 임상시험에 기존 데이터 활용을 촉진하는 쪽으로 정책을 펴고 있다.

해외선 신약 개발 필수 아이템…몸값 높아지는 의료 빅데이터

의료 빅데이터는 신약 개발에 필수적인 도구다. 국내에서는 아직 걸음마 단계지만 미국 유럽 등에선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글로벌 빅파마인 스위스 로슈가 대표적인 사례다.

로슈는 2011년부터 항암제 개발 방식을 바꿨다. 유전체 데이터, 환자 진료 데이터 등을 토대로 전략을 짠다. 어떤 암환자에게, 어떤 약을 만들어서, 어떤 컨디션으로 질환을 해결해줄지를 결정한 뒤 개발에 들어간다. 대상 환자를 정밀하게 타깃한 뒤에 신약 개발 프로젝트를 가동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환자의 세부적인 유전체 데이터는 물론 질병력, 투약 기록 같은 환자 진료 데이터 등이 필수적이다.

로슈는 2018년 플랫아이언헬스라는 스타트업을 19억달러(약 2조원)에 인수했다. 플랫아이언헬스가 보유한 미국 암클리닉 100여곳의 암환자 진료 데이터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로슈는 이 데이터를 임상시험 환자군을 찾고 분석하는 등의 용도로 활용하고 있다. '당뇨, 고혈압 없는 췌장암 3기' 같은 조건의 환자군을 실시간으로 찾고 분석할 수 있어서다.

로슈 뿐만이 아니다. 화이자 등 빅파마들은 의료 데이터 확보를 위해 수백명의 전담팀을 가동하고 있다. 의료 데이터를 타깃 신약 물질 발굴은 물론 임상시험 환자 모집, 판매 중인 의약품의 부작용 모니터링 등에 활용하기 위해서다. 조 대표는 "시장 분석, 타깃 설계, 환자 모집 등 신약 개발 전 과정에 의료 빅데이터를 활용하는 게 보편화되고 있다"며 "신약 실패 확률을 줄이는 것은 물론 개발 시간이나 비용도 크게 낮출 수 있다"고 했다.

의료 분산데이터 플랫폼 기업들도 성업 중이다. 2015년 설립된 탬퍼스AI는 노바티스 GSK 등에 AI 기반 유전체 분석과 의료 빅데이터를 제공하며 급성장하고 있다. 2020년 1억8800만달러였던 매출은 지난해 6억9340만달러로 3배 넘게 늘었다. 칼라일그룹이 대주주인 미국 트라이넷엑스도 100여개 병원을 연계하는 분산 데이터망을 운영하며 성장세를 타고 있다.

의료 빅데이터는 보험 산업에도 접목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보험 상품을 설계하거나 보험 가입자를 모집할 때 의료 빅데이터가 필수적이다. 미국 최대 건강보험사인 유나이티드헬스케어가 옵튬이라는 의료 데이터 분석회사를 직접 세웠을 정도다.


"질병 예측으로 서비스 진화…해외 진출도 본격화"

에비드넷은 정밀의료를 넘어 예측의료 서비스도 준비 중이다. 유전체 데이터와 병원 의료 데이터를 토대로 환자의 질환을 조기진단하고 발병 시점까지 예측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에비드넷은 국립암센터가 주도한 암 예후예측 지원 시스템 구축 사업,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의 고형암 및 알츠하이머 조기진단과 예측 소프트웨어 개발 사업 등에 참여했다. 의료 분산데이터망을 활용해 대규모 감염병 유행을 감시하는 사업도 지원했다.

에비드넷은 의료 분산데이터 플랫폼이 확장될수록 사업 기회는 더욱 커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조 대표는 "플랫폼 기업과 병원 간 데이터 고속도로가 만들어지면 수백만명, 수천만명의 환자 데이터를 한번에 분석할 수 있다"며 "그 결과를 토대로 맞춤형 의료, 신약개발, 보험상품 개발 등 인류의 건강을 증진시키는 분야에서 활용될 수 있다"고 했다.

글로벌 헬스케어 데이터 시장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마켓앤드마켓에 따르면 2022년 274억달러였던 글로벌 헬스케어 데이터 산업 규모는 2027년 859억달러로 성장할 전망이다.

에비드넷은 해외 진출도 추진 중이다. 일본, 대만 등 아시아 시장이 타깃이다. 의료 데이터 플랫폼 시장이 아직 활성화되어 있지 않아 시장 선점이 가능하다는 판단에서다. 대신 미국 시장은 RWE 서비스로 진출을 노리고 있다. 글로벌 제약사들의 RWE 수요가 많기 때문이다. 조 대표는 "아시아는 의료시스템이 우리나라와 유사한 만큼 탬퍼스AI 등 미국 분산데이터 플랫폼 업체들이 진출하더라도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영태 바이오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