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드베르크의 지휘자 된 임윤찬, 건반 하나하나가 악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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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통영국제음악제 리사이틀 리뷰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앞에서 임윤찬은 더 특별해진다. 이 곡을 연주할 때면 그가 누르는 건반 하나하나가 악기가 된다. 각각의 건반들은 저마다 다른 사람이 연주하는 것처럼 통통 튀어오르는 음을 내면서도 서로 호응하면서 일정한 흐름을 만들어낸다. 건반들은 모여 오케스트라를 이루고, 임윤찬은 피아노란 이름의 악단을 이끄는 지휘자가 된다.
이하느리 곡과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연주
음량 조절 극대화해 그라데이션 만들어
공연장 1300여석이 임윤찬과 ‘물아일체’
연주시간도 피아니스트별 편차가 크다. 골드베르크 변주곡 연주를 유행시킨 피아노 거장 글렌 굴드는 1955년 단 38분 만에 전곡을 모두 녹음했다. 빠른 템포로 연주하며 도돌이표를 과감히 생략하는 파격이 돋보였다. 1981년 녹음에선 분량이 51분으로 늘어났다. 2022년 5월 명동성당에서 선보였던 손민수의 연주는 81분이 걸렸다. 하프시코드의 리듬감을 살린 굴드보다는 숭고함이 더 살아나는 연주였다. 임윤찬이 이번에 쓴 연주시간은 78분으로 스승과 비슷했다. 그는 손민수가 명동성당에서 공연했던 다음 달 “손 교수님이 명동성당에서 뼈를 깎는 노력으로 연주하신 걸 듣고 감동받았다”며 “저도 골드베르크 전곡 연주에 도전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첫 곡을 마치고 이하느리를 무대에 불러 관객들과 인사한 임윤찬은 청중들의 박수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골드베르크 변주곡에 발을 들였다. 시작은 담담했다. 그는 몰입을 경계하고 아리아의 근음들을 차근차근 밟아갔다. 건반 하나하나를 누르는 데서 나름의 깊이를 조절하는 맛이 느껴졌지만 감정을 처음부터 쏟아내진 않았다. 잔잔함에 귀가 익숙해졌을 무렵, 임윤찬은 첫 변주를 시작하자마자 단단하고 경쾌한 타건으로 듣는 이들의 고막을 때렸다. 뒤이어 음량을 갑작스럽게 줄였다가 늘리기를 반복하며 다채로움을 더했다.
임윤찬은 연주 전반에서 압도적인 음량 조절 능력을 드러냈다. 그는 음을 줄이거나 키우는 과정에서 짧지만, 분명한 그라데이션을 잇따라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템포를 유지해 거장의 연주와도 같은 유려함을 지켰다. 마치 임윤찬은 사분면의 X축에 ‘음의 세기’를, Y축에 ‘템포’를 놓고 연출하려는 분위기에 맞춰 이들 변수를 자유롭게 조절하는 수학자 같았다. 15번째 변주 즈음부터는 속도를 자유롭게 조절하고 꾸밈음을 늘려나가며 로코코 음악 같은 분위기를 냈다. 20번째 중반부의 변주에선 연주가 격해지면서 낭만주의 곡처럼 바흐를 재해석하기도 했다.
임윤찬은 변주곡의 시작인 아리아를 다시 연주한 뒤 아리아의 근음 만을 다시 연주하는 앙코르 연주로 통영에서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그의 연주에 빠진 청중 대부분은 기립박수로 임윤찬의 열띤 연주에 보답했다. 퇴장할 때는 뛰려다 말아서 걷는 게 돼버린 그의 총총걸음이 매력이었다. 피아노 앞에서 보였던 기교와 열정이 넘치는 예술가로서의 모습과 대비되는 그의 겸손함이 돋보였다. 그렇게 임윤찬은 음의 그라데이션뿐 아니라 무대 전반에 걸쳐 선명한 대조를 드러냈다. 꽃샘 추위에 맑아진 하늘이 분홍빛 벚꽃을 더 유별나게 만드는 통영의 저녁이었다.
통영=이주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