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드베르크의 지휘자 된 임윤찬, 건반 하나하나가 악기였다

30일 통영국제음악제 리사이틀 리뷰
이하느리 곡과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연주
음량 조절 극대화해 그라데이션 만들어
공연장 1300여석이 임윤찬과 ‘물아일체’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앞에서 임윤찬은 더 특별해진다. 이 곡을 연주할 때면 그가 누르는 건반 하나하나가 악기가 된다. 각각의 건반들은 저마다 다른 사람이 연주하는 것처럼 통통 튀어오르는 음을 내면서도 서로 호응하면서 일정한 흐름을 만들어낸다. 건반들은 모여 오케스트라를 이루고, 임윤찬은 피아노란 이름의 악단을 이끄는 지휘자가 된다.
30일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연주하고 있는 피아니스트 임윤찬. / 사진출처. ⓒSungchan Kim. 통영국제음악제
30일 통영국제음악제가 열린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임윤찬은 리사이틀 공연으로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선보였다. 바흐는 이 곡의 도입부인 아리아에서 나오는 멜로디를 활용해 서른 가지 버전의 변주를 만들었다. 3·6·9번째 등 3의 배수 차례에 나오는 변주들은 카논(돌림노래) 형식으로 만들어 곡 전체에 통일성을 부여했다. 이 곡이 만들어졌던 1741년엔 피아노가 없었다. 당시 쓰였던 건반악기는 음의 강도를 표현하지 못하는 하프시코드. 이 때문에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악보엔 셈여림이 없다. 음의 세기를 피아노로 어떻게 표현할지는 연주자의 몫이다.

연주시간도 피아니스트별 편차가 크다. 골드베르크 변주곡 연주를 유행시킨 피아노 거장 글렌 굴드는 1955년 단 38분 만에 전곡을 모두 녹음했다. 빠른 템포로 연주하며 도돌이표를 과감히 생략하는 파격이 돋보였다. 1981년 녹음에선 분량이 51분으로 늘어났다. 2022년 5월 명동성당에서 선보였던 손민수의 연주는 81분이 걸렸다. 하프시코드의 리듬감을 살린 굴드보다는 숭고함이 더 살아나는 연주였다. 임윤찬이 이번에 쓴 연주시간은 78분으로 스승과 비슷했다. 그는 손민수가 명동성당에서 공연했던 다음 달 “손 교수님이 명동성당에서 뼈를 깎는 노력으로 연주하신 걸 듣고 감동받았다”며 “저도 골드베르크 전곡 연주에 도전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30일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연주하고 있는 피아니스트 임윤찬. / 사진출처. ⓒSungchan Kim. 통영국제음악제
골드베르크 변주곡에 앞서 임윤찬은 촉망받는 10대 작곡가인 이하느리(19)의 곡 ‘라운드 앤드 벨브티-스무드 블렌드’를 먼저 선보였다. 지난 23~25일 고양에서 선보였던 리사이틀과 같은 레퍼토리 구성이었다. 이하느리의 곡에서 임윤찬은 각얼음으로 탑을 세우듯 날카롭고 청아한 고음들을 조심스럽게 쌓아갔다. 이 얼음 탑이 굳어갈 즈음엔 빙벽을 터뜨리듯 강렬한 음들을 쏟아내며 폭발시켰다. 뒤따르는 고음이 잔향을 남길 땐 바닷물에 녹은 빙하가 서늘한 공기를 공연장에 남겨둔 것만 같았다. 얼음조각의 섬세함과 무너지는 빙벽의 강렬한 대비는 임윤찬이 앞으로 보여줄 극적인 그라데이션들을 보여주는 서막이 됐다.

첫 곡을 마치고 이하느리를 무대에 불러 관객들과 인사한 임윤찬은 청중들의 박수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골드베르크 변주곡에 발을 들였다. 시작은 담담했다. 그는 몰입을 경계하고 아리아의 근음들을 차근차근 밟아갔다. 건반 하나하나를 누르는 데서 나름의 깊이를 조절하는 맛이 느껴졌지만 감정을 처음부터 쏟아내진 않았다. 잔잔함에 귀가 익숙해졌을 무렵, 임윤찬은 첫 변주를 시작하자마자 단단하고 경쾌한 타건으로 듣는 이들의 고막을 때렸다. 뒤이어 음량을 갑작스럽게 줄였다가 늘리기를 반복하며 다채로움을 더했다.

임윤찬은 연주 전반에서 압도적인 음량 조절 능력을 드러냈다. 그는 음을 줄이거나 키우는 과정에서 짧지만, 분명한 그라데이션을 잇따라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템포를 유지해 거장의 연주와도 같은 유려함을 지켰다. 마치 임윤찬은 사분면의 X축에 ‘음의 세기’를, Y축에 ‘템포’를 놓고 연출하려는 분위기에 맞춰 이들 변수를 자유롭게 조절하는 수학자 같았다. 15번째 변주 즈음부터는 속도를 자유롭게 조절하고 꾸밈음을 늘려나가며 로코코 음악 같은 분위기를 냈다. 20번째 중반부의 변주에선 연주가 격해지면서 낭만주의 곡처럼 바흐를 재해석하기도 했다.
30일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연주하고 있는 피아니스트 임윤찬. / 사진출처. ⓒSungchan Kim. 통영국제음악제
29번째 변주에선 피아노가 타악기가 됐다. 임윤찬이 일정한 리듬으로 세차게 피아노 페달을 밟아나가는 모습은 킥 드럼을 치는 드러머의 모습에 가까웠다. 격정적인 연주를 쉼 없이 쏟아낸 왼손을 허공에 털어내며 한 템포 쉬어갈 땐 스승인 손민수의 모습이 겹쳐지기도 했다. 임윤찬은 다음 변주를 시작하기 전 앞으로 쏠린 머리칼을 젖히며 숨을 고르거나 3층 객석 쪽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가 손에 묻은 땀을 닦아낼 때면 청중들도 조였던 긴장을 풀고 함께 숨소리를 내쉬었다. 공연장 1300여석 모두가 임윤찬과 호흡을 같이하는 물아일체의 순간이었다.

임윤찬은 변주곡의 시작인 아리아를 다시 연주한 뒤 아리아의 근음 만을 다시 연주하는 앙코르 연주로 통영에서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그의 연주에 빠진 청중 대부분은 기립박수로 임윤찬의 열띤 연주에 보답했다. 퇴장할 때는 뛰려다 말아서 걷는 게 돼버린 그의 총총걸음이 매력이었다. 피아노 앞에서 보였던 기교와 열정이 넘치는 예술가로서의 모습과 대비되는 그의 겸손함이 돋보였다. 그렇게 임윤찬은 음의 그라데이션뿐 아니라 무대 전반에 걸쳐 선명한 대조를 드러냈다. 꽃샘 추위에 맑아진 하늘이 분홍빛 벚꽃을 더 유별나게 만드는 통영의 저녁이었다.

통영=이주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