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 퇴짜맞는 中企 "금리 인하기, 은행 문턱 되레 높아져"

K금융 밸류업 딜레마
(上) 밸류업의 역설…우량 기업에만 대출 쏠린다

지점서 대출 받아오면 본사 '컷'
주가 부양 위해 자본비율 관리
회사채 대신 국고채만 사들여

"주식 보유·벤처 투자 꿈도 못 꿔"
중견기업마저 "자금줄 막혔다"
은행들이 주주환원 여력을 확보하기 위해 중소기업 대출을 줄이고 있다. 사진은 서울의 한 은행 대출 창구에서 신청서를 작성하는 모습. 한경DB
“기업금융 담당자(RM)들이 현장에서 신규 대출을 받아와도 본점에서 번번이 퇴짜를 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위험가중자산(RWA)을 줄이기 위해 알짜 대출만 골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최근 만난 시중은행장들의 한결같은 토로다. 이른바 ‘밸류업(기업가치 제고) 딜레마’다. 은행들은 보통주자본비율(CET1) 관리를 위해 때아닌 알짜 대출 경쟁에 내몰렸다. 신용도가 낮은 중소기업들은 갈수록 자금 확보에 애를 먹고 있다.

◇기피 대상 된 비우량 기업대출

31일 금융권에 따르면 4대 시중은행의 개인사업자 대출은 지난해 11월 이후 4개월 연속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월별 증가액이 4조~5조원에 달한 중소기업 대출도 올 들어 월평균 1조원 아래로 떨어지면서 증가폭이 크게 둔화했다. 지지부진한 금융지주 주가를 부양하기 위한 밸류업 정책이 기업대출 통로를 조이고 있다는 게 업계 분석이다. 은행들이 경쟁적으로 기업 대출을 확대하던 1~2년 전과는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실제 은행들은 밸류업에 힘을 주기 위해 비우량 기업대출을 꺼리고 있다. 자칫 대출액의 150%(신용등급 BB 이하)가 위험자산에 포함될 수 있어서다. 신용등급이 없는 소기업은 대출액이 고스란히 위험자산에 반영된다. 금융권 관계자는 “최근 신용 평가 시즌을 맞아 신용등급 하락이 예상되는 기업들은 은행마다 대출을 꺼리는 분위기”라며 “기업대출 대신 일반 주택담보대출이나 상업용 부동산 대출을 선호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금융지주들의 주식 보유(상장주식 130%, 비상장주식 200%)나 벤처 투자(400%) 등은 꿈도 꾸기 어렵다는 전언이다.

◇회사채도 안 사는 은행들

은행들은 회사채 대신 국고채 매입에 적극 나서고 있다. 위험자산 관리를 위해서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3월 은행들이 순매수한 회사채 규모는 2057억원으로 집계됐다. 반면 국고채 순매수액은 7조원대를 넘어섰다. 고금리 회사채를 매수해 이자 수익을 극대화하는 대신 위험자산 관리를 위해 국채 등 우량 채권 위주로 매입한 결과다.

금융지주들이 자본비율 사수를 위해 총력을 다하고 있는 것은 주주 환원 때문이다. KB금융은 CET1 13.5%를 초과하는 분만큼 주주 환원에 사용하겠다고 공언했다. 작년 순이익이 5조원에 달하지만 자본비율을 높이지 못하면 주주환원 규모를 늘릴 수 없는 구조다.

◇우량 中企 가로막는 밸류업

금융회사들이 밸류업 딜레마에 빠지면서 중소·중견 기업은 자금을 구하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다. 대기업에 비해 신용도가 낮아 회사채 시장을 이용하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은행들마저 자금줄을 죄고 있어서다. 기술력을 인정받아 수출을 앞둔 건실한 업체조차 대출 장벽을 넘지 못할 정도다.

한 알루미늄 제품 업체 대표는 “중국 기업에 맞서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신규 공장 부지를 사놨는데 대출이 끊겨 설비 투자를 하지 못하고 있다”며 “담보를 제공해도 대출이 나오지 않거나 영업이익률이 4%대인 기업에 터무니없는 고금리를 요구하니 중국과 경쟁해보지도 못하고 포기해야 할 판”이라고 토로했다.

은행 방침 변화로 대출 연장이 안 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인천의 한 부품업체 대표는 “최근 2년간 매출이 40% 이상 줄면서 적자를 보는 와중에 은행이 대출 만기 연장을 해주기 어렵다고 통보해 다른 은행을 알아보고 있다”며 “앞으로 2~3개월 뒤 사업을 어떻게 꾸려나갈지 걱정된다”고 했다. 한 금형업체 대표는 “은행들이 2022년부터 금리를 연 6%대로 올리고 난 뒤 기준금리가 많이 내렸는데도 대출 만기 연장 때 금리를 낮춰주지 않는다”며 “대출을 갚을 형편이 안 되는 곳들은 사업을 접거나 인력을 정리해 대응하고 있다”고 전했다.

박재원/박진우/장현주 기자 wonderfu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