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라스 쉬프와 26년 항해한 오케스트라, 이토록 아름다운 마침표

[리뷰] 안드라스 쉬프 & 카펠라 안드레아 바르카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30일 공연

26년 동행한 안드라스 쉬프와 카펠라 안드레아 바르카,
유머와 따뜻한 위로로 채운 그들의 마지막 항해
안드라스 쉬프(Andras Schiff)는 바흐 작품의 “소박하고 꾸밈없는 경건성”에 주목한다. 그는 신과 교구를 위해 자신의 능력을 꾸준히 사용했던 바흐의 작업이 마치 “르네상스 시대의 거대한 성당 건축물과 같다”고 말한다. 숭고한 가치를 위한 묵묵한 헌신은 세상의 혼돈 속에 질서를 부여했고, 고매한 건축물과 같이 지금까지 남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왔다.

바흐는 그야말로 “서양 음악의 절대 봉우리”였다. 그 거대한 봉우리 옆에서 빛을 내는 모차르트를 두고 쉬프는 “환상적인 선율가”혹은 “음향의 마법사”라고 칭했다. “모든 연주자에게는 그에 맞는 레퍼토리가 있다”고 말하는 쉬프에게 바흐와 모차르트는 베토벤과 더불어 평생의 동반자였다. 불필요한 기교 없이 작품 본연의 아름다움에 집중하는 안드라스 쉬프의 바흐, 모차르트 연주는 당대의 피아니스트에게 가장 모범적인 교본이 되어왔다.
지휘자 안드라스 쉬프(András Schiff) / 사진. © Nadja Sjöström
지휘자 안드라스 쉬프(András Schiff) / 사진. © Nadja Sjöström
카펠라 안드레아 바르카(Cappella Andrea Barca)는 그의 이름을 이탈리아어로 유쾌하게 해석한 것에서 따왔다. 독일어로 배를 뜻하는 쉬프(Schiff)를 이탈리아어로 보트를 뜻하는 바르카(Barca)로 옮긴 것이다. 악단 명을 고민하던 쉬프는 특유의 유머감각으로 자신의 이름을 딴 가상 인물 ‘바르카 선생(Signor Barca)’을 탄생시켰다. 종종 그는 바르카 선생이 모차르트의 연주를 도와주는 전설적인 페이지 터너였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유머와 즉흥적인 결단으로 1999년 결성된 이 그룹은 잘츠부르크 모차르트 주간(Mozartwoche Salzbur)에서 피아노 협주곡 전곡 연주를 치른 것을 비롯해 전 세계를 다니며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등의 고전음악을 탐구해 왔다.
카펠라 안드레아 바르카(Cappella Andrea Barca) 오케스트라 / 사진. © Angelo Nicoletti
카펠라 안드레아 바르카(Cappella Andrea Barca) 오케스트라 / 사진. © Angelo Nicoletti
카펠라 안드레아 바르카와의 26년 여정을 마무리하는 투어로 우리나라를 방문한 쉬프는 바흐와 모차르트의 작품을 선곡했다. 공연은 바흐의 협주곡 중에서도 가장 사랑받는 두 작품인 ‘건반악기를 위한 협주곡’ 3번과 7번으로 시작한다. 이어 7번 협주곡과 같은 조성(G minor)인 모차르트의 교향곡 40번 연주로 전반부가 마무리된다. 특유의 비극미가 인상적인 40번 교향곡의 분위기를 이어받아 모차르트의 돈 지오반니 서곡이 후반부의 시작을 알리고, 같은 조성(D minor)을 이어받은 피아노 협주곡 20번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섬세하게 조율된 선곡으로 구성된 그들의 마지막 공연을 앞두고 객석은 한껏 상기돼 있었다. 콘서트홀에는 안드라스 쉬프가 “다른 피아노가 범접하지 못할 ‘칸타빌레(Cantabile, 노래하듯 이라는 뜻의 음악 용어)’를 표현할 수 있다”고 극찬한 뵈젠도르퍼(Bösendorfer) 피아노가 준비돼 있었다. 쉬프는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전 세계 대부분의 공연장을 독점한 것에 날이 선 비판을 해왔다.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동료들 사이로 차분하게 등장한 안드라스 쉬프는 조금은 수더분한 분위기로 바흐의 건반악기를 위한 협주곡 3번 연주를 시작했다. 쉬프는 상기된 객석 분위기를 달래기라도 하듯 피아노 특유의 따뜻한 음색을 살린 건반 터치로 찬 바람을 뚫고 자리에 앉은 관객들의 마음을 데워줬다. 악장의 중반부가 넘어서면서 템포에 적응한 오케스트라는 본격적인 항해를 알리듯 질주하기 시작했다. 차분한 호흡으로 시작한 2악장에서는 양 측면에 배치된 두 콘트라베이스 주자의 부드럽고 균형감 있는 저음 연주가 피아노의 따뜻한 음색을 포옹하는듯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카펠라 안드레아 바르카 / 사진. © Marcia Lessa
손이 풀린 쉬프는 3악장에 이르러 유려하게 꾸밈음을 연주하며 맑고 선명한 고유의 음색을 선보였다. 예열이 끝난 쉬프와 오케스트라는 보다 짜임새 있는 연주로 바흐의 건반악기 협주곡 7번을 연주했다. 쉬프는 앞선 3번 협주곡과 마찬가지로 2악장에서 섬세하게 댐퍼 페달을 밟아가며 울림을 컨트롤했는데, 오케스트라의 저음 연주와 밀도감 있게 어우러지는 소리를 자아냈다.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피아니스트와 오케스트라의 노련함이 만들어낸 풍부한 사운드로 객석의 분위기는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

독주자에서 지휘자로 자리를 옮긴 쉬프는 보다 늘어난 선원들을 한데 모아 모차르트 교향곡 40번 연주를 시작했다. 오케스트라는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기민한 템포를 이어갔다. 비올라를 시작으로 현악기가 애수 어린 멜로디를 연주하자 목관의 음표가 조화롭게 스며들어 가기 시작했다. 현악기와 목관악기는 마치 대화하듯 질주했는데, 긴장감과 비장미 속에서도 따뜻함을 잃지 않았다. 조금은 느슨한 템포로 시작된 2악장에서도 오보에와 플루트 등 목관악기의 사운드가 발군이었다.

두 대의 호른이 금관 특유의 거친 소리를 최대한 덜어내 현악기와 균형을 맞추는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미뉴에트의 형식을 빌려 비장미를 이끌어낸 3악장이 되자 오케스트라는 무도를 추기 시작했다. 자칫 극적인 분위기가 과해질 수 있었지만, 호른의 울림이 온화하게 균형을 이루며 사운드를 조율했다. 시종일관 안정적인 연주를 이어온 오케스트라는 마지막 악장에서도 흠잡을 데 없는 조화를 보여주었는데, 시프의 지휘는 마치 “음향의 마법사” 모차르트에게 표하는 경의와도 같았다.
사진. © Hyeonkyu Lee
공연은 하이라이트의 연속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극적인 분위기를 이어갔다.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 서곡은 무엇보다도 각 악기군의 균형감 있는 표현이 중요하다. 지휘자의 성향에 따라서 비극적 결말을 암시하는 듯한 첫 부분에서 저음부를 강조해 비극미를 극대화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쉬프는 바이올린과 저음 파트를 명확하고 세밀하게 그려냈다. 이어 소리를 낸 목관악기들은 극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객석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쉬프는 서곡의 연주가 끝남과 동시에 피아노 협주곡 20번 연주를 바로 이어갔다. 오페라 원작에서 서곡 연주 이후 중단 없이 바로 1막 연주가 이어지는 것을 연상케 하는 부분이었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 연주는 하이라이트의 연속에서 맛보는 절정과도 같았다. 오케스트라의 조화로운 연주는 마치 녹음된 음반을 듣는 것처럼 완벽했다. 쉬프는 적극적이고 섬세한 페달링으로 풍성한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감성적이면서도 감상에 빠지지 않는 명확한 표현과 균형감은 쉬프와 카펠라 안드레아 바르카의 명성을 드러내는 부분이기도 했다. 특히, 돈 조반니의 서곡의 멜로디를 활용해 시작한 3악장의 카덴차는 쉬프의 유머 감각과 짜임새 있는 선곡을 돌아보게 만들며 감탄을 자아냈다.

앙코르에서는 안드라스 쉬프가 1975년 22세의 나이로 리즈 콩쿠르 결선에서 선보인 바흐의 건반악기를 위한 협주곡 1번 1악장이 연주됐다. 길고 뜨거운 관객의 박수에 화답하듯 입을 반쯤 벌리고 호흡하듯 연주를 시작한 쉬프는 젊은 시절만큼이나 화려한 손놀림을 선보였고, 오케스트라도 절묘한 호흡을 이루는 연주로 객석의 감탄을 자아냈다.
사진. © Hyeonkyu Lee
두 번째 앙코르곡은 모차르트 또 다른 단조 피아노 협주곡 24번 2악장으로, 콘서트의 유일한 장조 작품인 첫 번째 곡에 화답하는 듯한 장조(내림 마장조) 선곡이었다. 피아노에 대한 선택부터 연주에 대한 규범까지 확고한 신념을 가진 쉬프의 연주는 자칫 엄격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신념은 자신을 드러내고 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닌, 음악 본연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전달하기 위한 의무를 다하는 것에 가깝다. 카펠라 안드레아 바르카와의 마지막 항해에서도 그는 특유의 유머와 따뜻한 연주로 청중에게 가장 아름다운 음악의 모습을 선물했다.

그가 올곧은 신념을 지키는 일은 단지 음악의 경계에서만 머물지 않는다. 홀로코스트를 겪은 가정에서 태어난 쉬프는 헝가리에서 극우 지도자인 빅토르 오르반 총리가 당선된 2010년 이후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최근에는 이민자를 무차별하게 추방하는 트럼프 대통령을 보이콧하며 올가을부터 예정된 미국 공연을 전면 취소했다. 유대인의 강제 추방을 떠올리게 하는 극우 정치가들의 행보에 적극 대응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바다에 떨어지는 물방울 같은 일”처럼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고 뉴욕타임즈를 통해 밝혔다. 스스로의 양심을 지키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그의 언행은 우리에게 음악과 음악가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만든다.
사진. © Hyeonkyu Lee
조원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