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마 속에도 이웃부터 챙긴 영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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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 중 영덕 마을 덮친 불길 속 어르신들 구조
이장·계장·외국인 선원, 골프장 직원까지 ‘투혼’
“할매가 안 보여서, 소리치고 집에 들어가서 업고 나왔어요. 조금만 늦었더라면 정말 큰 일날 뻔 했습니다.”
경북 영덕군 축산면 경정3리 마을에 사는 김필경 이장(56), 유명신 어촌계장(56), 그리고 인도네시아 선원 수기안토(31)씨는 지난달 25일 오후 10시께 산불이 마을로 밀려들 무렵 이상 징후를 감지하고 주민들을 대피시켰다.
김 이장은 선착장에서 마을 오른편을, 유 계장은 왼편을, 수기안토 씨는 마을 중심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대피방송 시스템까지 고장나면서 이들은 고함을 치며 문을 두드리고, 잠든 주민들을 깨웠다. 특히 수기안토 씨는 고령으로 거동이 불편한 주민 7명을 등에 업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2일 경북 의성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이 안동·청송을 거쳐 영덕까지 번졌지만 이웃들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많은 시민들이 위기를 넘겼다. '시민 영웅'들은 뜨거운 불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웃들을 먼저 챙겼고, 마을을 지키기 위해 밤낮으로 불을 껐다. 소방당국이 미처 도착하지 못한 현장에서 이들이 맨몸으로 산불에 맞선 덕분에 대형 참사를 막을 수 있었다. 이번 산불은 여의도 면적 165배에 달하는 4만8000ha를 태우는 등 2000년 이후 국내에서 발생한 최악의 산불로 기록됐다.
나보다 이웃 먼저 생각한 시민 영웅들
산불 속 나타난 시민 영웅들의 구조 활동은 SNS를 통해 뒤늦게 알려졌다. 수기안토씨와 같은 마을에서 일하는 인도네시아인 레오씨도 주민 구조에 일조했다. 그는 어눌한 한국어로 "할머니"를 외치며 대피를 도왔다. 레오씨는 "산불이 자꾸만 다가오는데, 할머니가 안보여서 집안에 자고 있는 할머니를 업고 대피했다"며 "당시 앞도 잘 안보이고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서 몇 번을 넘어질 뻔 했다"고 긴박한 상황을 설명했다.
레오가 타고 있는 배의 선장인 임청길(57)씨는 "이 친구들(외국인 선원)도 자기 나름대로 놀랬다"며 "자기들끼리 '가자 가자'해서 할머니들을 모시고 왔다"고 전했다.
그는 레저보트와 낚싯배를 몰고 현장에 도착했지만 방파제에는 배를 댈 공간이 없었다. 대신 선착장에 있던 트럭을 몰고 방파제까지 진입해 주민 10여명을 태워 선착장으로 옮긴 뒤, 보트를 이용해 낚싯배까지 실어 날랐다. 이 작업을 반복해 20여명을 축산항까지 구조했다.
"산불에 골프장 뚫리면 하회마을 위험"
다른 지역에서도 구조 행렬은 이어졌다. 경북 안동 리버힐CC에서는 캐디 20여 명과 직원들이 산불로부터 골프장은 물론 인근 하회마을까지 지켜냈다.
지난달 25일 산불이 인근 산등성이를 따라 경북 안동으로 번져오자 골프장은 경기를 전면 중단하고 대피했지만 밤 10시께 직원들은 “골프장까지 산불에 뚫리면 인근 하회마을까지 위험하다”며 자원해 다시 현장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잔디 관수차 4대와 살수차 1대를 동원해 불길이 번지는 구간에 물을 뿌리며 방화선을 만들었다. 전기와 수도가 끊기자 골프장 해저드 3곳의 물을 끌어다 썼고, 해저드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물을 뿜었다. 직원과 캐디들 덕분에 소방대와 헬기 지원 없이 1㎞ 넘게 방어선을 지켜냈다.
직원들은 닷새간 교대로 불씨 감시를 이어갔다. 산불은 골프장을 넘지 못했고, 덕분에 하회마을도 피해를 피할 수 있었다. 류동기 경기팀 직원은 “진짜 목숨 걸고 했다”며 “줄을 잡고 낭떠러지 아래로 내려가 불을 껐다”고 말했다.
법무부, 수기안토에 장기거주 자격 검토
정부도 시민 영웅들에 대한 제도적 지원을 검토하고 있다. 법무부는 “산불 당시 주민 대피에 기여한 수기안토 씨의 공로를 인정해 장기거주(F-2) 자격 부여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F-2 비자는 대한민국에 특별한 기여를 한 외국인에게 법무부 장관이 부여할 수 있는 장기 체류 자격이다.
권용훈 기자 fac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