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더 살아야 해?" 영화 '더 폴'이 묻고, 베토벤이 답하다

[arte] 김수미의 최애의 최애

영화 '더 폴'의 로이도, 작곡가 베토벤도
시련과 죽음을 마주했을 때 '삶의 의미'를 찾았다
왜 누군가는 그만 살기로 결심할까?

살다 보면 예기치 못하게 누군가를 잃는다. 불의의 사고, 도저히 손 쓸 수 없는 병,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있다. 그중에서도 마음에 가장 깊은 숙제를 남기는 것은 맨 후자다. 스스로 선택한 죽음 뒤에 남겨진 사람들은 끝없이 질문을 던지게 된다. 중학교 시절, 앞자리에 늘 말없이 무언가를 끄적이는 친구가 있었다. 짧은 몇 마디를 주고받은 게 전부지만, 연습장에 빼곡히 그려둔 그림을 보고 놀라워하는 내게 그 아이가 수줍게 미소 지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얼마 후, 그 빈자리를 두고 친구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때 슬픔이나 충격보다도 어떤 질문 하나가 마음에 짙게 자국을 남겼다. ‘내가 뭔가 더 물어봤더라면, 조금 더 그 애의 얘기를 들어줬더라면, 혹시 달라질 수 있었을까?’
영화 '더 폴' 포스터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18년 만에 재개봉한 <더 폴>은 내 오랜 흉터를 다시금 간지럽힌 영화다. 주인공 로이는 하루아침에 삶에 대한 의지를 잃어버린 인물이다. 스턴트맨이던 그는 불의의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고, 사랑하던 연인을 주연 배우에게 빼앗긴 뒤, 죽음만을 간절히 원한다. 그의 강렬한 바람은 결국 이루어질까? 영화는 로이가 사고를 당한 직후의 순간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흑백의 슬로우 모션으로 아비규환의 현장이 펼쳐지는 가운데, 베토벤 교향곡 제7번 2악장이 묵묵히 흐른다. 이 곡이 정확히 어떤 의도로 선택되었는지 알기 어렵지만, 나는 이 조합이 운명적이라 느껴졌다. 베토벤 역시 로이처럼 삶의 의미를 잃고, 유서를 쓴 적 있기 때문이다.

베토벤의 유서, 창작열의 발화점이 되다
하일리겐슈타트 유서의 첫 페이지(1802년 10월 6일, 베토벤이 “하일리겐슈타트”(오늘날에는 빈의 일부)에서 두 동생, 카를과 요한에게 쓴 편지이다.) /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청력 상실은 베토벤이 겪은 가장 큰 시련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두려워했던 것은 사회적 고립이었다. 베토벤은 자신의 병이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오는 위안, 섬세한 담소의 즐거움, 풍성한 감정의 교류’를 앗아가서 두 배로 괴롭다고 토로했다. 온갖 치료법을 시도했지만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요양차 머문 하일리겐슈타트에서 그는 결국 유서를 쓴다. 그런데 이 유서는 조금 특이하다. 두 동생에게 자신의 절망을 토로하며 시작된 편지는, 차츰 운명을 받아들이고 삶의 사명을 또렷하게 발견하는 내용으로 바뀌어 갔기 때문이다.

“내가 내 손으로 내 삶을 끝내는 데 별로 모자란 것은 없어 보이지만 오직 예술, 그것이 나를 다시 붙들어주었다. 아, 내게 두근거림을 느끼게 해준 이 모든 것을 이루기 전에 세상을 뜬다는 건 내게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서 나는 이 비참한 삶의 기한을 연장하기로 했다.”

- 나성인, 『베토벤 아홉 개의 교향곡』 중 (한길사)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는 절망의 기록이 아니라, 아직 쓰지 못한 음악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깨달음을 담은 전환점이 됐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베토벤의 창작열은 더욱 뜨겁게 타올라, 그의 대표작 대부분이 유서 이후에 탄생했다. 그가 이 시기에 완성한 작품은 교향곡 제2번이지만, 당시 그가 겪었을 심정적 변화를 가장 닮은 곡은 제7번 2악장이라고 생각한다.

곡에서 반복되는 ‘장-단-단-장-단’의 장송 행진곡 리듬은 어두운 긴장감을 자아내는데, 드라마틱한 격랑을 지나 장조로 전환되면서 음악의 에너지는 온화하고 견고한 기쁨으로 변환된다. 이후 다시 초반의 리듬이 반복되지만, 이는 죽음의 그림자가 아니라 죽음에 맞서는 엄숙한 용기처럼 들린다. 이 곡은 표면적으로 절망과 두려움, 좌절이라는 어둠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으나, 그 심연에 부정의 감정이 긍정의 빛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내재된 폭발력을 품고 있음을 암시하는 듯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베토벤의 극심한 좌절과 고립감이 오히려 삶의 의미를 되찾고 창작의 불꽃을 지피는 발화점이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영화 '더 폴'의 로이, 모르핀 대신 얻은 구원.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더 폴>의 로이도 비슷한 여정을 겪는다. 걷기는커녕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사치인 그에게는 죽음을 택하는 일마저 버겁다. 그런 그의 앞에, 팔을 다쳐 입원한 꼬마 ‘알렉산드리아’가 나타난다. 로이는 순진한 아이를 꼬드겨 모르핀을 얻어낼 속셈으로 매일 이야기를 들려주며 가까워진다. 죽음을 향해 지어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의 이야기 역시 일종의 유서와도 같다. 병원 생활이 따분하기만 했던 알렉산드리아는 로이의 환상적인 이야기에 푹 빠진다. 아이의 지루함은 상상력의 자양분이 되고, 그녀는 로이가 들려주는 모험 속에 자신이 아는 얼굴들을 끼워 넣는다. 총독 ‘오디어스’에게 추방당한 다섯 인물의 복수극에서 로이는 블랙 밴디트, 알렉산드리아는 그의 딸로 등장하게 된다. 이야기는 점점 로이 혼자가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 만드는 이인삼각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를 통해 모르핀을 얻으려던 계획이 실패하자 로이는 절규한다. 그 모습을 본 알렉산드리아는 그를 기쁘게 해줄 생각으로 약을 훔치려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만다. 머리 수술을 받고 막 깨어난 아이에게 로이는 눈물을 흘리며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데, 알렉산드리아는 이야기를 마저 들려달라며 천진난만하게 조를 뿐이다. 로이는 자기 마음속 어둠을 고스란히 담아 결말을 써 내려간다. 이야기 속 인물들이 하나둘 죽고, 블랙 밴디트마저 힘없이 쓰러진다. 그러나 곁에서 간절하게 애원하는 알렉산드리아로 인해 그는 마음을 바꾼다. 무기력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던 블랙 밴디트가 온 힘을 다한 한방으로 역습에 성공하고, 겁에 질려 흐느끼는 딸(알렉산드리아)에게 달려가 안아주는 것으로 이야기는 맺어진다. 이는 로이의 변화된 내면을 고스란히 비춘다. 그에게 새로운 삶의 의미가 자라난 것이다.

결말을 바꾸는 단 한 걸음

“사랑으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나, 혹은 아직 완성하지 못한 일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게 된 사람은 자기 삶을 던져버리지 못할 것이다.”

- 빅터 프랭클, 이시형 옮김 『죽음의 수용소에서』 (청아출판사)

오스트리아의 신경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인 빅터 프랭클은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까지 모두 박탈당하는 경험을 했다. 그 극한의 나락에서 그는 오히려 삶의 본질을 발견했고, 이를 바탕으로 로고테라피(의미 치료)를 창시했다. 그는 ‘삶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극한의 상황에서도 살아낼 수 있다’고 주장하며 시련이야말로 삶에 깊은 의미를 부여할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더 폴>과 베토벤 음악의 조합은 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고, 죽음밖에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약해졌던 두 사람의 이야기가 맞물린다는 점에서 절묘하다.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생을 더욱 명료하게 불러내는 결말은 희망적이다. 그러나 그 고독한 여정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한 가지 진실이 남는다. 어디까지나 자기의 몫인 셈이다.

다시 나의 물음표 앞에 돌아와 앉는다. 혼자만의 싸움을 해야 하는 연약한 이에게, 상대방의 새로운 삶의 의미가 될 정도로 가깝지도 않으며, 대신해서 찾아줄 수도 없는 제3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천착하는 이유는 누군가를 도울 기회를 망연히 흘려보냈을지 모른다는 부채감, 그리고 지금 곁에 있는 누군가의 신호를 놓친 채, 또 아무것도 못 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인 것 같다.

두 사람의 이야기에서 얻은 힌트는 이것이다. 베토벤은 당장 눈앞에 놓인 해야 할 일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알렉산드리아는 결말을 바꾸기 위해 블랙 밴디트에게 많은 것을 한꺼번에 요구하지 않았다. 처음엔 힘없이 쓰러져 있는 그에게 일어나라고 부탁했고, 겨우 몸을 일으킨 그에게 울고 있는 딸을 안아주라며 눈앞의 한 걸음씩을 끌어냈을 뿐이다.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죽음을 생각했지만 그 과정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발견한 이들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들려주는 것.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딱 ‘한 걸음’ 더 움직일 수 있는 가능성을 함께 고민하는 것 아닐까. 그리운 이들에게 연락해 소소한 만남을 약속하고, 며칠 뒤에 함께 맞이할 구체적인 작은 즐거움을 그려두는 이유다. 그 한 걸음이 아주 사소해 보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다시 길을 찾게 하는 이정표가 될 수 있으니까.

김수미 음악 칼럼니스트

[영화 '더 폴(The Fall)' - Opening Titles : 베토벤 교향곡 제7번 2악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