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더 살아야 해?" 영화 '더 폴'이 묻고, 베토벤이 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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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수미의 최애의 최애왜 누군가는 그만 살기로 결심할까?
영화 '더 폴'의 로이도, 작곡가 베토벤도
시련과 죽음을 마주했을 때 '삶의 의미'를 찾았다
살다 보면 예기치 못하게 누군가를 잃는다. 불의의 사고, 도저히 손 쓸 수 없는 병,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있다. 그중에서도 마음에 가장 깊은 숙제를 남기는 것은 맨 후자다. 스스로 선택한 죽음 뒤에 남겨진 사람들은 끝없이 질문을 던지게 된다. 중학교 시절, 앞자리에 늘 말없이 무언가를 끄적이는 친구가 있었다. 짧은 몇 마디를 주고받은 게 전부지만, 연습장에 빼곡히 그려둔 그림을 보고 놀라워하는 내게 그 아이가 수줍게 미소 지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얼마 후, 그 빈자리를 두고 친구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때 슬픔이나 충격보다도 어떤 질문 하나가 마음에 짙게 자국을 남겼다. ‘내가 뭔가 더 물어봤더라면, 조금 더 그 애의 얘기를 들어줬더라면, 혹시 달라질 수 있었을까?’
베토벤의 유서, 창작열의 발화점이 되다
“내가 내 손으로 내 삶을 끝내는 데 별로 모자란 것은 없어 보이지만 오직 예술, 그것이 나를 다시 붙들어주었다. 아, 내게 두근거림을 느끼게 해준 이 모든 것을 이루기 전에 세상을 뜬다는 건 내게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서 나는 이 비참한 삶의 기한을 연장하기로 했다.”
- 나성인, 『베토벤 아홉 개의 교향곡』 중 (한길사)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는 절망의 기록이 아니라, 아직 쓰지 못한 음악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깨달음을 담은 전환점이 됐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베토벤의 창작열은 더욱 뜨겁게 타올라, 그의 대표작 대부분이 유서 이후에 탄생했다. 그가 이 시기에 완성한 작품은 교향곡 제2번이지만, 당시 그가 겪었을 심정적 변화를 가장 닮은 곡은 제7번 2악장이라고 생각한다.
곡에서 반복되는 ‘장-단-단-장-단’의 장송 행진곡 리듬은 어두운 긴장감을 자아내는데, 드라마틱한 격랑을 지나 장조로 전환되면서 음악의 에너지는 온화하고 견고한 기쁨으로 변환된다. 이후 다시 초반의 리듬이 반복되지만, 이는 죽음의 그림자가 아니라 죽음에 맞서는 엄숙한 용기처럼 들린다. 이 곡은 표면적으로 절망과 두려움, 좌절이라는 어둠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으나, 그 심연에 부정의 감정이 긍정의 빛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내재된 폭발력을 품고 있음을 암시하는 듯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베토벤의 극심한 좌절과 고립감이 오히려 삶의 의미를 되찾고 창작의 불꽃을 지피는 발화점이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를 통해 모르핀을 얻으려던 계획이 실패하자 로이는 절규한다. 그 모습을 본 알렉산드리아는 그를 기쁘게 해줄 생각으로 약을 훔치려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만다. 머리 수술을 받고 막 깨어난 아이에게 로이는 눈물을 흘리며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데, 알렉산드리아는 이야기를 마저 들려달라며 천진난만하게 조를 뿐이다. 로이는 자기 마음속 어둠을 고스란히 담아 결말을 써 내려간다. 이야기 속 인물들이 하나둘 죽고, 블랙 밴디트마저 힘없이 쓰러진다. 그러나 곁에서 간절하게 애원하는 알렉산드리아로 인해 그는 마음을 바꾼다. 무기력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던 블랙 밴디트가 온 힘을 다한 한방으로 역습에 성공하고, 겁에 질려 흐느끼는 딸(알렉산드리아)에게 달려가 안아주는 것으로 이야기는 맺어진다. 이는 로이의 변화된 내면을 고스란히 비춘다. 그에게 새로운 삶의 의미가 자라난 것이다.
결말을 바꾸는 단 한 걸음
“사랑으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나, 혹은 아직 완성하지 못한 일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게 된 사람은 자기 삶을 던져버리지 못할 것이다.”
- 빅터 프랭클, 이시형 옮김 『죽음의 수용소에서』 (청아출판사)
오스트리아의 신경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인 빅터 프랭클은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까지 모두 박탈당하는 경험을 했다. 그 극한의 나락에서 그는 오히려 삶의 본질을 발견했고, 이를 바탕으로 로고테라피(의미 치료)를 창시했다. 그는 ‘삶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극한의 상황에서도 살아낼 수 있다’고 주장하며 시련이야말로 삶에 깊은 의미를 부여할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더 폴>과 베토벤 음악의 조합은 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고, 죽음밖에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약해졌던 두 사람의 이야기가 맞물린다는 점에서 절묘하다.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생을 더욱 명료하게 불러내는 결말은 희망적이다. 그러나 그 고독한 여정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한 가지 진실이 남는다. 어디까지나 자기의 몫인 셈이다.
다시 나의 물음표 앞에 돌아와 앉는다. 혼자만의 싸움을 해야 하는 연약한 이에게, 상대방의 새로운 삶의 의미가 될 정도로 가깝지도 않으며, 대신해서 찾아줄 수도 없는 제3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천착하는 이유는 누군가를 도울 기회를 망연히 흘려보냈을지 모른다는 부채감, 그리고 지금 곁에 있는 누군가의 신호를 놓친 채, 또 아무것도 못 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인 것 같다.
두 사람의 이야기에서 얻은 힌트는 이것이다. 베토벤은 당장 눈앞에 놓인 해야 할 일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알렉산드리아는 결말을 바꾸기 위해 블랙 밴디트에게 많은 것을 한꺼번에 요구하지 않았다. 처음엔 힘없이 쓰러져 있는 그에게 일어나라고 부탁했고, 겨우 몸을 일으킨 그에게 울고 있는 딸을 안아주라며 눈앞의 한 걸음씩을 끌어냈을 뿐이다.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죽음을 생각했지만 그 과정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발견한 이들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들려주는 것.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딱 ‘한 걸음’ 더 움직일 수 있는 가능성을 함께 고민하는 것 아닐까. 그리운 이들에게 연락해 소소한 만남을 약속하고, 며칠 뒤에 함께 맞이할 구체적인 작은 즐거움을 그려두는 이유다. 그 한 걸음이 아주 사소해 보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다시 길을 찾게 하는 이정표가 될 수 있으니까.
김수미 음악 칼럼니스트
[영화 '더 폴(The Fall)' - Opening Titles : 베토벤 교향곡 제7번 2악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