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종·페미니즘…피트먼의 '시각적 과잉'에 숨은 은유

래리 피트먼 '거울&은유'展

전남도립미술관서 국내 첫 개인전
14년간 제작한 40여 점 전시

미국인 父·콜롬비아 母 영향
자신만의 독특한 장식미 구축
'알'이라는 모티프로 여성성 표현
래리 피트먼의 대표 연작 중 하나인 ‘알 기념비가 있는 반짝이는 도시 #3’(2023). 부화할 준비를 마친 알은 새로운 가능성, 생명력, 잠재력 등을 뜻한다. /전남도립미술관 제공
래리 피트먼(73)은 미국 회화에서 보기 어려운 특유의 밀도 높은 스타일로 남다른 시각적 미학을 개척한 작가다. 세계적인 갤러리 리만머핀은 2021년 서울 한남동에 전시장을 열 때 피트먼의 작품을 제일 먼저 걸었다. 복잡한 기호와 상징적 어휘, 혼돈 속 질서가 보이는 정교한 테크닉, 색채와 텍스트, 이미지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은 그의 독창적인 회화를 설명하는 특징이다.

전남 광양 전남도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피트먼의 개인전 ‘거울&은유(Mirror&Metaphor)’는 미술 애호가들의 남도행을 재촉할 만한 전시다. 동시대 회화의 한 갈래를 직접 살펴볼 수 있는 기회란 점에서다. 국내 미술관에서 피트먼의 개인전이 개최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피트먼의 회화는 미국 화단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장식미가 두드러진다. 그의 정체성의 기반이 ‘혼종 문화’이기 때문이다. 미국인 아버지와 콜롬비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유년 시절을 콜롬비아에서 보냈고, 1980년대 이후엔 멕시코시티에 자주 머물며 멕시코의 전통 미학에서 영감을 얻었다. 커다란 보석을 소재로 삼은 ‘디오라마’ 연작이나 패턴이 두드러지는 ‘후기 서구 제국의 진기한 물건들’이 대표적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피트먼은 “앵글로·색슨 문화권에선 장식 요소가 작품의 내용을 방해한다고 보는 경향이 있지만, 라틴아메리카 문화에선 장식 요소가 있는 그대로 내용이 되고 또 이미지가 되기도 한다”며 “나는 미국과 라틴아메리카 문화의 하이브리드(혼종)적인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개념과 장식미를 동시에 보여주는 게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의 예술을 설명하는 또 다른 중요한 정체성 중 하나가 페미니즘이다. 1970년대 캘리포니아예술대(CalArts)를 다닌 그는 당시 유행하던 1세대 페미니즘 미술에 큰 영향을 받았다. 백인·남성·서구 위주의 보수성이 강하던 당대 미술계에서 여성이나 흑인, 성소수자의 해방은 색다른 예술적 담론을 얻을 수 있는 창구였다. 피트먼은 “페미니즘이라는 렌즈로 미술사를 바라보면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인다”고 했다.

이를 관통하는 핵심이 ‘알(Eggs)’이라는 시각적 모티프다. 전시에 나온 대형 작품 ‘알 기념비가 있는 반짝이는 도시’ 등이 대표적이다. 작품마다 알은 세계 그 자체이거나 부화할 준비를 마친 생명 등으로 묘사된다. 20세기 벌어진 전쟁과 냉전 등이 남성적 틀로 이해된다는 점에서 피트먼은 안티테제(반정립)로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알이라는 여성적 이미지를 내세운다.

흥미로운 점은 페미니즘적 경향성이 강한 작품에서 멕시코 거장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프리다 칼로의 남편으로도 유명한 리베라는 거대한 벽화에 멕시코 민중과 역사적 사건을 새겨 넣은 작가다. 여성편력까지 화려했던 터라 대체로 강한 남성적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피트먼은 “리베라에게 깊은 애정을 갖고 작품활동을 해왔다”며 “개인의 감정이나 서사뿐 아니라 대상을 역사적 존재라고 보는 그의 장르에 관심을 뒀다”고 말했다.

피트먼의 작품은 일견 인공지능(AI)이 생성한 이미지 같기도 하다. 어지러울 만큼 많은 이야기와 상징이 담겨 있고, 시각적 과잉이라 할 만큼 이미지가 가득해서다. 커다란 거인이 세계를 감싸고 있는 것 같은 ‘아이리스 샷 열림과 닫힘’ 연작은 미드저니 등 생성형 AI가 그려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실제로 피트먼은 그림을 그리기 전 책상에 앉아 어떤 콘셉트로 어떤 색을 쓸지 등 작품 개요를 적어 내려간다. 생성 AI의 프롬프트(명령어)와 비슷한 셈이다.

다만 AI는 피트먼의 그림을 완벽히 묘사해낼 수 없다. 피트먼은 고립에서 풍요에 이르기까지 현대인의 삶에 대한 고민을 작품에 담기 때문이다. 한 장면의 시작과 끝을 의미하는 영화 용어에서 영감을 받아 바이러스의 강약에 따라 인간의 고립과 출현이 반복되는 모습을 담은 ‘아이리스 샷’ 연작은 오랜 문명과 도시, 인간에 대한 통찰이 없으면 나올 수 없는 작품이다.

전시에는 ‘카프리초스’, ‘녹턴’ 등 피트먼이 지난 14년간 제작한 작품 40여 점이 나왔다. 전시는 6월 15일까지.

유승목 기자 mo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