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잠든 후에만 그림 그리던 소년...선한 아름다움 피워내는 도인이 되다

[arte] 한성희의 길 위의 미술관

장욱진 편 ③

오직 그림밖에 모르던 작가 장욱진

생의 마지막 시기를 보낸 용인에서
자신의 그림과 닮은 집을 짓고 생활해

자연을 동경하며 스스로를 도인으로 그리기도
▶▶▶[길 위의 미술관 : 장욱진 편 ①] 명륜동에서 피어난 장욱진의 순수한 미학
▶▶▶[길 위의 미술관 : 장욱진 편 ②] 장욱진이 담아낸 나의 동네, 나의 가족, 나의 새벽 친구

장욱진은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가족 중 특히 유년 시절 경제적 지원을 했던 고모의 반대가 심해 모두가 잠든 시간에만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 그림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 1938년 '전조선학생미전'에서 <공기놀이> 작품으로 특선을 하여 조선일보사장상을 받은 것이다. 당시 상금은 거금 100원이었다. 여기서 받은 상금으로 고모에게 비단을 선물했다. 이 상을 계기로 가족들에게 그림을 그려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공기놀이>는 한옥 담벼락 아래에 소녀들이 모여 앉아 공기놀이를 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잘려 나간 주련의 글귀에는 '우중화'라고 쓰여 있다. 허균의 형 허봉의 시 <추일> 중 '국화는 빗속에 꽃을 드리우네'에서 따온 글이다. 장욱진의 초기 향토적 색조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바닥에 멍석처럼 보이는 검은 그림자와 황토, 흑, 백색의 모노톤 채색이 특징이다. 소녀들 얼굴의 윤곽은 드러나지 않는다. 서 있는 소녀의 등에 업힌 아기 얼굴은 구체적 윤곽이 없다. 대비가 심한 명암에 의해 두면으로 구분될 뿐이다. 화면을 분할하여 분석적으로 표현하는 서구의 입체파 경향을 찾아볼 수 있는 작품이다.
장욱진 &lt;공기놀이&gt;(1938), 캔버스에 유채, 80 x 65cm, 삼성문화재단소장 / 출처. 장욱진미술문화재단 홈페이지
장욱진 &lt;공기놀이&gt;(1938), 캔버스에 유채, 80 x 65cm, 삼성문화재단소장 / 출처. 장욱진미술문화재단 홈페이지
화가가 전쟁 시기 몸에 지니고 피난길에 오를 정도로 애정한 작품이 있다. 대략 5등신으로 그려진 <소녀>라는 작품이다. 고향 선산 산지기의 딸을 모델로 그렸다. 토속적 한국인의 얼굴, 적갈색 저고리에 긴 댕기 머리, 작품은 향토적 정서가 물씬 묻어난다. 이 작품의 뒷면에는 나무패널에 <나룻배>를 그려 넣었다. 한국전쟁 시기 고향 연기에 머물며 그린 작품이다.

이때 고향에서 그린 장욱진의 대표작 중 하나가 <자화상>(1951)이다. 세상이 온통 소용돌이치는 파국임에도 목가적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어서 평화로운 세상이 오기를 갈구하는 화가의 마음이 역설적으로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무기력한 전쟁 시기 고향인 연기군 동면에 돌아와 창작열이 불타올랐던 시기에 그려졌다. 이 그림은 '대자연의 완전 고독 속에 있는 자기를 발견한 자신의 모습'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자연 속에 나 홀로 들판을 가로질러 걸어오고 있지만 공중에선 새들이 나를 따르고 길에는 강아지가 나를 따라오는 모습이다. 자화상은 자신의 자의식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는 완전한 고독은 오히려 자유롭다고 말한다. 완전한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 검은 프록코트를 입고 한 손에 우산을 들고 황금 들판 사잇길을 당당히 걸어간다. 나의 길을 가겠다는 모더니스트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장욱진 &lt;자화상&gt;(1951), 종이에 유채, 10.8 x 14.8cm / 출처. 현대화랑, 한경DB
장욱진 &lt;자화상&gt;(1951), 종이에 유채, 10.8 x 14.8cm / 출처. 현대화랑, 한경DB
술이 시간을 두고 발효되어 만들어지듯 명륜동에서 덕소, 수안보, 용인으로 화실을 옮길 때마다 작품이 충분히 숙성되어 만들어지면 개인전을 열었다. 그는 "전람회는 답답해서 하는 것이다. 죽 늘어놓고 보면 뭐가 나온다. 다음에 할 의욕도 나오고 일종의 과정이다. 필요에 의해 하는 거다. 반성은 안 한다. 시간 아까운데 반성은 왜 해?"라고 그의 수필집 『강가의 아뜰리에』에서 말했다. 가수 장기하의 노래가 생각난다. <그건 니 생각이고> 노래 가사를 보면 다른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오직 자신에게 충실한 장욱진식 사고가 엿보이는 듯 그의 생각과 가사가 중첩된다.

내가 너로 살아 봤냐 아니잖아
니가 나로 살아 봤냐 아니잖아
걔네가 너로 살아 봤냐 아니잖아
아니면 니가 걔네로 살아 봤냐 아니잖아
(…)그냥 니 갈 길 가

- 장기하의 노래 <그건 니 생각이고> 가사 중 일부
용인에서 장욱진이 생활했던 한옥 작업실 / 사진. © 한성희
화가는 용인에서 마지막 시기를 보낸다. 오래된 한옥을 구입한 뒤 개조해서 생활했다. 한옥 뒤편에는 <자동차가 있는 풍경>의 집을 그대로 재현한 양옥집을 짓고 생활공간으로 활용했다. 수안보 시기 이후 문인화적 그림과 더불어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도인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이제 화가에서 그는 도인이 되었나 보다. 어느 미술비평가는 도인으로 나오는 작품 모두는 장욱진의 자화상이라고 평했다. 자연을 동경하고 자연 속에서 살고자 한 화가의 모습이 투영된 것이다. 나무와 대화하는 도인의 모습도 보인다. 달도 나무도 도인도 비스듬하게 그려 일체감을 이루기도 한다.
장욱진 &lt;자동차가 있는 풍경&gt;(1953), 캔버스에 유채, 30 x 40cm / 출처. 장욱진미술문화재단 홈페이지
용인에서 지내던 시기, 장욱진이 설계한 2층 양옥집 / 사진. © 한성희
그의 마지막 시기 그려진 작품들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하다. <밤과 노인>은 흰색 도포를 걸친 노인이 도인이 되어 하늘을 날며 먼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두 갈래로 뻗은 주황색 끊어진 길 위에는 우왕좌왕 방황하는 소년과 함께 그동안 그려진 까치와는 달리 흰색의 까치가 그려져 있다. 작품 속 등장하는 까치는 그의 분신이다. 전체 700여 작품 중에서 까치가 등장하는 작품은 무려 440여점에 달한다. 마지막 절필 작품은 동아일보 신년 축하용으로 그린 하늘을 힘차게 날아오르는 새를 표현한 먹그림이다. 그는 1990년 12월 27일 비원 근처에서 점심식사 후 지병인 천식이 도져 한국병원에 입원 후 그날 오후에 작고한다. 마지막도 심플했다.
장욱진 &lt;밤과 노인&gt;(1990), 캔버스에 유채, 32 x 41cm / 출처. 장욱진미술문화재단 홈페이지
아름다움을 넘어서 착한 그림을 그린 화가 장욱진. 그림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써버린 화가. 그의 그림은 작고 사랑스럽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 속에서 행복해한다. 다함이 없도록 착하면서 동시에 다함이 없도록 아름답다. 주변 일상적 풍경들을 선한 아름다움으로 전통 속에서 담아낸 장욱진은 한국 근현대 미술의 독보적인 존재이다. 한국미의 전통을 바탕으로 장욱진 스타일을 만들어 현대적으로 계승한 모더니스트 1세대 화가로 미술사에 오래 기억될 것이다.

한성희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