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처럼 자유롭고 강렬하게 한 생을 살다 떠난 발 킬머

배우 발 킬머 별세 (1959~2025)
발 킬머를 처음 (스크린으로) 본 것은 <히트>(마이클 만, 1995)라는 영화에서였다. 러닝타임 170분에 육박하는 이 느와르 서사극에서 발 킬머는 로버트 드니로의 캐릭터, ‘닐 맥콜리’가 이끄는 범죄 단체의 크루, ‘크리스 쉬허리스(Chris Shiherlis)’로 등장했다. 그는 눈부신 금발 단발머리에 슈트 차림으로 기관총을 난사하는 마이클 만 식(式) 도시 느와르의 아이콘이었다. 킬머는 이 영화의 압도적 주연 캐릭터들인 알 파치노와 로버트 드니로를 대적할 만한 배우이자 90년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미남 스타였다.
영화 '히트'의 크리스 쉬허리스 역을 맡은 발 킬머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히트'의 크리스 쉬허리스 역을 맡은 발 킬머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적지 않은 수의 (미남) 배우들이 그렇지만, 배우 발 킬머에게 가장 큰 약점은 그의 눈부신 미모였던 것 같다. 줄리어드 음대에서 연기를 전공하고, 오랜 시간 동안 연극무대에서 배우로서의 숙련을 이어온 그였지만, 파도처럼 찰랑찰랑한 금발 머리에, 소년 같은 미소를 가진 그가 맡은 역할은 연기 보다 얼굴을 메인 스펙터클로 하는 할리우드의 상업영화 속 캐릭터들이었다. <리얼 맥코이>(러셀 멀케이, 1993)에서 킴 베이싱어의 매력적인 연인 J.T. <베트맨 포레버>(조엘 슈마허, 1995)의 브루스 웨인까지도 아름다운 외모 아래 감춰진 발 킬머의 수려한 연기력을 드러내지 못했다.
영화 '더 리얼 맥코이(The Real McCoy)' 스틸컷 / 사진출처. IMDb
영화 '더 리얼 맥코이(The Real McCoy)' 스틸컷 / 사진출처. IMDb
그의 타고난 외모도, 연기도 이상적으로 발현된 프로젝트가 있다면 바로 올리버 스톤의 <더 도어즈(The Doors)>(1991)였다. 70년대를 대표하는 록밴드 ‘더 도어즈’의 일대기를 담은 이 영화에서 발 킬머는 밴드의 리더이자 시인, ‘짐 모리슨’ 역할을 맡았다. 술과 마약 과다복용로 인한 환각 상태에서도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밴드 이름, ‘더 도어즈’도 블레이크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서 만들어진 것이다) 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글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모리슨의 짧은 일생은 모리슨과 놀랍도록 닮은 발 킬머의 육신을 통해 그리고 그의 섬세한 연기를 통해 스크린에서 재현되었다. 킬머는 영화에서 등장하는 더 도어즈의 대표곡들을 자신이 모두 직접 불러 사운드트랙에 참여하기도 했다.
영화 '도어즈(The Doors)'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누군가의 ‘아이 캔디’로든, 혹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뛰어난 배우로든 발 킬머는 명백히 90년대 할리우드를 ‘풍미’했던 배우였다. 그리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배우들이 모두 그랬듯, 발 킬머 역시 내리막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여전히 론 하워드, 토니 스캇 등의 할리우드의 A리스트 감독들과 작업을 했지만, 그의 역할은 그다지 인상적인 캐릭터들이 아니었으며 관객들에게 그의 존재는 점점 작아졌다. 나 역시 그랬던 것 같다. 어느 순간엔 가장 좋아하는 배우로 빌 킬머를 읊어대던 시절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언제였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그는 욕실 벽에 깨진 타일처럼, 나의 과거 속 어딘가에 존재하는 한 부분이 되었다.

이후 정말 놀라운 모습의 그를 다시 한번 스크린에서 조우했다. 바로 <탑건: 매버릭> (조셉 코신스키, 2022) 을 통해서였다. <탑건>의 첫 에피소드에서 탐 크루즈가 맡은 주인공 캐릭터, ‘매버릭’의 친구, ‘아이스맨’으로 등장했던 그는 무려 36년 이후에 만들어진 속편에서 장교로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모습은 긴 시간에도 마모되지 않은 그의 친구 탐 크루즈와는 달리 너무나도 야위고, 수척했다. 그는 후두암으로 목소리를 잃었고, 수차례의 항암치료로 인해 쇠잔해진 모습이었다. 영화 속에서 그는 메버릭의 오랜 친구이자 죽음을 앞둔 노역 대령으로 등장했고, 결국 그의 연기는 현실로 ‘재현’되었다.

<탑건: 매버릭>에서 발 킬머의 시퀀스는 짧지만 강했다. 마치 인생의 클라이맥스처럼 그것은 찰나처럼 지나갔어도 극장의 로비를 나갈 때까지 머릿속에 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를 힘겹게 읽어나가는 듯했지만, 킬머의 목소리에는 강인함과 의지가 역력했다. 그는 무엇보다 연기를 하고 싶었다. 그는 <탑건: 매버릭>의 프리미어 이후에 열린 인터뷰에서 <베트맨 포에버>의 베트맨을 다시 연기하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과연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당대의 배우들과 최고의 연기를 겨루던 발 킬머에게 몇 안 되는 표정만으로 완성했던 수퍼 히어로 영화는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영화 '탑 건: 매버릭'에서 아이스맨 역을 맡은 발 킬머 / 사진출처. 발 킬머 인스타그램
궁극적으로 발 킬머는 베트맨도, 아이스맨도 다시 연기하지 못하고 65세라는 짧은 나이에 우리를 떠났다. <히트>에서 영화사의 기록적인 순간들을 함께 만들었던 알 파치노와 로버트 드니로 같은 전설들 보다도 그는 훨씬 더 먼저, 너무나도 이른 나이에 스크린과 무대를 모두 떠나버렸다. 그럼에도 그는 그가 <도어즈>에서 했던 대사와도 같이, 시에 숨겨진 ‘늑대’처럼 자유롭고 강렬하게 한 생을 살았다. (All the poems have wolves in it. All but one. The most beautiful one of all.) 그리고 그 생은 클라이맥스처럼 짧지만 찬란한 것이었다.

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