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프리즘] 무역 전쟁 시대…관(官)부터 전시체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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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 정부, 민간 인재 등용 '바람'
우리도 관료 조직 문화 바꿔야
고경봉 편집국 부국장

미국에서 종종 연출되는 이런 장면은 기업인과 금융인 출신으로 가득한 미국 행정부의 색깔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노회하게 에둘러 가는 기존 정치인의 화법과 다르게 효율을 우선하고 실리를 좇아 직진하는 방식 말이다.
각국의 고위 관료 사회를 보면 언제부터인가 산업계, 금융계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들이 유난히 눈에 띈다. 정부 수장들부터 남달라졌다. 트럼프는 부동산 사업가 출신이고,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는 정치 경험이 거의 없는 금융·테크 전문가다.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로스차일드에서, 지난해 중반까지 재임한 리시 수낵 전 영국 총리는 골드만삭스 등에서 업력을 쌓았다. 남미와 아프리카의 개발도상국에도 기업인이나 금융전문가 출신 집권 사례가 늘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신(新)중상주의 흐름이 거세지며 나타난 현상이다.
공직사회의 벽도 허물어지고 있다. 미국 행정부만 해도 기업인, 금융인 출신이 즐비하다.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은 투자사 최고경영자(CEO) 출신이고 크리스 라이트 에너지부 장관과 일론 머스크 정부효율부 수장은 대기업 창업자다. 린다 맥마흔 교육부 장관은 프로레슬링 엔터테인먼트 기업인 WWE CEO 출신이다. 미국뿐 아니다. 인공지능(AI) 중심의 테크 패권주의와 제조업 주도권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공공 부문부터 변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
샘 올트먼 오픈AI CEO(미국), 데미스 허사비스 딥마인드 CEO(영국), 카이푸 리 전 구글 차이나 CEO(중국) 등 각국 AI 분야를 대표하는 거물들이 정부의 기술 정책을 자문하고 협업을 주도하는 게 일상이 됐다. 공무원을 뽑을 때 민간 부문 수시 채용이나 부처별 자율 채용제도를 도입하는 국가도 늘고 있다. 얼마 전 조사에 따르면 미국 내 고위 공무원의 절반 이상, 연방정부 기술·전문직은 60% 이상이 민간 경력자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 관료 조직은 여전히 ‘그들만의 사회’다. 4급 이상 중앙정부 공무원 8500여 명 중 민간 출신을 의무적으로 뽑는 경력개방직은 1.6%인 138명에 불과하다.
세계 각국이 사활을 걸고 벌이는 이 기술·무역 전쟁에 대응하려면 관료 부문부터 전시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채용 시스템과 조직 문화의 유연성과 효율성을 확 끌어올리는 게 우선이다. 그래야 관 중심 경제 구조가 바뀌고 기업이, 시장이 바뀐다. 민간 전문가와 해외 인재까지 참여하는 이종 결합이 공공부문 곳곳에서 이뤄지고, 자율 경영과 내부 경쟁 그리고 창의성을 중시하는 민간 DNA가 공직 전반에 뿌리내리게 해야 한다.
이참에 세계에서 가장 경직된 공무원 채용 제도인 ‘행정고시’도 수술해 민간에 문호를 넓혀야 한다. 기업인의 공직 진출에 걸림돌이 돼온 주식 백지신탁 제도 역시 시대에 맞게 고칠 필요가 있다. 많은 나라가 이런 제도를 가지고 있지만, 공직을 맡는다고 보유 주식과 경영권을 강제로 팔게 하는 곳은 사실상 한국이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