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무님, 비밀 못 지킵니다"…진급 누락되자 '사생활 협박' [김대영의 노무스쿨]

상사 USB 속 사진 빌미로
진급 청탁에 협박 행위도
징계해고 불복하고 소송
法 "신뢰 깨져 해고 정당"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게티이미지뱅크
한 반도체 소자 조립 업체. 이곳에서 기장 직급으로 일하던 A씨는 상급자인 같은 회사 전무 B씨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이번 진급에 저 좀 신경 써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는 내용이었다.

B씨는 이 메시지를 받고도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메시지를 보낸 지 약 3개월 뒤 진급심사 결과가 나왔다. A씨는 진급심사에서 탈락했다.

같은 날 밤 A씨가 다시 한 번 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A씨는 B씨에게 "전무님! 좀 서운하네요~"라고 털어놨다. B씨는 이번에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A씨는 사흘 뒤 B씨를 협박하는 내용의 메시지를 추가로 발송했다. 그는 카카오톡을 통해 "전무님! 점심식사 맛있게 드셨나요. 다름이 아니오라 전무님께서 저의 부탁을 거절했으니 저도 전무님에(의) 비밀을 거절하겠습니다"라고 전했다.

성생활 관련 사진으로 진급 청탁에 상사 협박

여기서 A씨가 말한 '비밀'은 B씨의 사생활이 담긴 사진을 말한다. A씨는 진급을 청탁한 첫 메시지를 보내기 약 2개월 전 우연히 B씨의 성생활 등 사생활에 관한 사진이 들어있는 USB를 습득했다. 이후 복사본만 B씨에게 돌려줬던 것.

B씨는 비밀을 지키지 않겠단 취지의 카카오톡 메시지를 받은 날에서야 A씨에게 답장을 보냈다.

그는 "진급심사는 회사 규정에 맞게 진행됐고 개인의 청탁으로 인한 부당한 진급심사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진급심사에 대한 불만과 개인정보 유출을 언급하는 부분은 곧 있을 회사심의위원회에서 시시비비를 가릴 것이니 그때 소명하세요"라고 답했다.

다음 날 A씨의 협박은 더 구체화됐다. A씨는 경영지원본부장(전무), 노조 위원장, 최고기술경영자(CTO) 등에게 보고하겠다는 메시지를 발송했다.

회사 징계위원회는 같은 달 말 A씨가 B씨를 협박했다는 사실관계를 확정한 후 "회사에서 협박 행위를 하지 말 것"이란 취업규칙 조항을 근거로 징계해고를 결정했다.

A씨는 징계해고에 불복해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진급심사 전 '잘 부탁드린다'는 메시지를 인사청탁으로 단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USB에 든 내용이 어떤 사생활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B씨에게 서운한 마음을 토로했을 뿐이라는 항변도 이어졌다.

형사재판선 협박죄 확정…"회사와 신뢰관계 깨져"

하지만 법원은 해고가 정당하다고 봤다. 인천지법 제11민사부(재판장 이경은)는 지난달 27일 A씨가 회사를 상대로 낸 해고 무효 확인 소송에서 원고패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전무의 비밀을 거절한다는 표현을 통해 USB 안의 사생활과 관련된 내용을 공개한다는 취지로 메시지를 발송한 것은 해악을 고지한 것"이라며 "A씨는 회사와의 면담에서 자신이 USB 안의 내용을 알고 있다는 취지로 진술하면서 B씨의 성생활 등 사생활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USB 안의 내용이 B씨에게 지극히 민감한 사생활에 해당함과 이를 공개할 경우 B씨에게 해악이 될 것을 잘 알면서 진급심사에 관한 메시지와 서운하다는 메시지, 비밀을 공개하겠단 취지의 메시지를 발송했다"며 "서운함의 표현에 그친 것이라 볼 수 없고 공손한 어투와 달리 이를 협박이 아니라고 보기도 어렵다"고 지적했다.

A씨는 앞서 또 다른 형사재판에서 이미 같은 사안으로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았다. 협박죄로 재판에 넘겨진 A씨의 이 사건 판결은 그대로 확정됐다.

진급심사 청탁, 협박 등의 행위가 있었던 만큼 더 이상 A씨와 회사 간 신뢰관계가 유지되기 어렵다는 점도 판단근거로 제시됐다. 무엇보다 회사가 취업규칙을 통해 사내 협박의 경우 해고가 가능하다고 못 박아둔 데다 반성하지 않을 때 가중 징계할 수 있다는 규정을 마련한 것도 법원 판단을 뒷받침했다.

재판부는 "A씨는 상사의 사생활과 관련한 비밀을 이용해 진급심사에서 이익을 얻으려 했는데 이는 중대한 비위행위로 A씨와 회사 사이의 신뢰관계가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렵다"며 "이로 인해 회사 임직원의 진급심사와 같은 제도·체계 등 위계질서가 문란하게 될 위험성이 적지 않고 피고의 기업질서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이 작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징계해고를 결정할 때나 법적 분쟁 과정에선 해고가 불가피할 정도로 중대한 비위행위라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중대한 비위행위라는 사실을 입증하면 근로자와 사용자 간 신뢰관계가 깨졌다는 판단을 끌어내기 용이하고 나아가 직장질서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어서다.

심요섭 법무법인 지평 변호사는 "근로자와 사용자 사이의 신뢰관계가 깨졌다고 판단하는 기준이 정립되어 있지는 않고 종합적으로 여러 요소를 살펴 판단하는데 결국에는 비위행위의 중대성을 입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비위행위가 중대하면 그 자체로 신뢰관계도, 직장질서도 무너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먼저 중대성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대영 한경닷컴 기자 kd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