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소리 듣는 K팝 작곡가…황현 "늘 남들이 안 하는 거 찾죠" [김수영의 크레딧&]

[김수영의 크레딧&]

황현 모노트리 대표 인터뷰
소녀시대·샤이니·온앤오프·재쓰비 곡 만들어
뛰어난 작·편곡 능력으로 'K팝 베토벤' 별명
"지치지 않고 음악 하는 게 인생의 챌린지"
황현 모노트리 대표 /사진=변성현 기자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전환기에서 중추 역할을 했던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혁신'을 대표하는 희대의 작곡가다. 전통적인 틀을 깨는 독창성, 역동적이고 풍부한 감정 표현까지 그의 음악은 200년이 넘은 현재도 많은 창작자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악성(음악 분야에서 성인이라는 뜻)'이라는 호칭이 붙은 유일한 인물인 베토벤에 비견되는 한국 작곡가가 있다. K팝 음악을 만들고 있는 황현 작곡가다. 'K팝의 베토벤이 황현이고, 베토벤이 독일의 황현이다'라는 밈은 이미 아이돌 팬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샤이니 '방백', 소녀시대 '첫눈에', 온앤오프 '사랑하게 될 거야', '뷰티풀 뷰티풀', '모스코 모스코', 재쓰비 '너와의 모든 지금' 등 숱한 명곡이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명확하게 귀를 파고드는 멜로디, 여운을 남기는 벅찬 감성까지 '좋은 음악'의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매번 새로운 사운드를 선사해 'K팝 베토벤'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세븐틴 '달링(Darl+ing)', 종현 '론리(Lonely)' 등 공동 작업한 곡도 모두 큰 사랑을 받았다. 한 경연 프로그램에서 그가 보여준 뛰어난 편곡 능력은 오랫동안 회자됐다.

최근 서울 성동구 성수동 모처에서 만난 황현은 'K팝 베토벤'이라는 호칭과 관련해 "굉장히 오글거린다"라면서도 "덕분에 더 열심히 하는 것 같다. 팬분들이 놀리려고 시작한 밈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분들을 실망하게 만들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응원해 준다는 건 축복받은 일"이라고 말했다.

한양대학교 작곡과에서 클래식을 전공한 그는 지난해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3악장의 테마를 인용해 온앤오프의 곡 '바이 마이 몬스터(Bye My Monster)'를 만들어 호평받았다. 피아노 솔로로 시작하는 전주, 이내 강렬하게 치닫는 비트, 그러다 후렴에는 심금을 울리는 클래식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3분여의 짧은 시간 안에 애절한 곡의 서사를 놀랍도록 입체적으로 풀어냈다. 잘 빠진 비트와 짧고 임팩트 있는 훅으로 승부를 보는 요즘 K팝 추세와는 확실히 다른 결이다. 멜로디컬한 음악에 머릿 속에서는 영화와 같은 이미지가 펼쳐지고, 섬세한 가사를 곱씹다 보면 마치 시 한 편을 뚝딱 읽은 느낌이 든다.

황현은 "라흐마니노프를 아주 좋아한다. 그의 곡을 시도한 팀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꼭 하고 싶었다. 10년도 더 된 생각이었는데 이제야 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 음악의 트렌드와는 동떨어져 있는 스타일이라서 곡을 쓰면서도 '이게 맞나?'라는 생각이 있었다"면서도 "하지만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 대형 기획사의 아이돌들이 하는 음악을 똑같이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요즘 하지 않는 게 무엇일까'를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룹 온앤오프 /사진=WM엔터테인먼트 제공
재쓰비 /사진=앨범 커버
음악의 힘 덕분에 온앤오프는 '성장형 그룹'으로 자리매김했다. 올해 발표한 곡 '더 스트레인저(The Stranger)'로는 데뷔 2766일 만에 첫 지상파 음악방송 1위를 차지했다. 이 역시 황현의 작품이다. 데뷔 때부터 줄곧 온앤오프를 프로듀싱하고 있는 그를 팬들은 '황버지(황현+아버지)'라고 부른다.

황현은 "엔터 관계자들이 나만 보면 축하한다고 얘기하더라. 많은 분이 온앤오프의 1등을 뜻깊게 바라봐 주고 있다는 생각에 고마웠다"면서 "늘 트렌드와는 조금 다른 곡을 만들었다. '우리도 요즘 유행하는 거 해야 하는 거 아냐?'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항상 내 생각을 이해해 주는 온앤오프의 소속사 WM엔터테인먼트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남들이 우르르하는 건 지양하겠다는 기질이 현재의 황현을 만든 동력인 듯했다. 그는 "일단 음악이 좋아야 하고, 두 번째로는 누구도 하고 있지 않은 걸 하려고 한다"면서 "물론 나도 사람인지라 이 세상에 없는 걸 할 수는 없다. 다만 지금 아무도 하고 있지 않은 건 반대로 누군가가 그리워하고 있는 걸 수도 있다. 진부함과 신선함은 한끗 차이라고 생각한다"고 소신을 밝혔다.

유행을 좇거나 누군가를 따라 하려고 하지 않으니 작업물은 더 견고하고, 또렷하게 고유의 색깔을 냈다. 온앤오프의 신보만 봐도 낯선 자라는 뜻의 '스트레인저'를 키워드로 두고 6개의 트랙이 마치 한 권의 책처럼 유기성을 지녔다. 낯설고 거친 세상에서 우리만의 길로 가겠다는 비장한 마음으로 시작해 '너라는 세상에서 나는 이방인'이라고 고백하는가 하면, 낯선 날들을 아름답게 그리며 '우린 굿 플레이스에 있다'고 감싸 안기도 한다. '낯설다'는 느낌이 이렇게나 다양하고 다채롭게 표현되는 감정이었나 싶은 정도로 풍성하게 다가온다.

황현은 "감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곡을 쓰기도 한다. 또 그게 잘못됐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쭉 연결되는 자연스러운 서사가 있는 곡을 더 오래 듣게 되더라"고 털어놨다.

이번 앨범에서 유일하게 자신이 참여하지 않은 곡인 '나띵 벗 어 스트레인저(Nothing but a stranger)'와 관련해서는 "너무 좋아하는 작곡가인 밍지션에게 곡을 받기 위해 A4용지에 한가득 곡의 서사를 적어서 줬다. 온앤오프의 프로듀서로서 꼭 밍지션에게 곡을 받아서 멤버들이 그의 알앤비를 부르는 순간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곡 스타일과 가사를 상세하게 주문했다. 오마카세 맛집은 배신을 안 하지 않나. 너무 좋을 거라고 예상했고, 당연히 좋았다"고 강한 만족감을 표했다.

또 다른 최근의 성과로는 재쓰비를 꼽을 수 있다. 편안하면서도 귀에 바로 감기는 멜로디의 '너와의 모든 지금'을 황현이 작·편곡했다. 황현은 "이 곡은 정말 순식간에 썼다. 예능을 통해 만들어진 곡이기도 해서 큰 사랑을 예상하지 못했다"며 "많은 분이 좋아해 줘서 신기하다. 재쓰비 분들이 아주 적극적이고, 열심히 해줬다. 가장 큰 힘은 그분들이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작사가인 김이나를 언급하며 비하인드를 전하기도 했다. 황현은 "곡을 쓰면 김이나 누나가 바로 가사를 쓰는 상황이었다. 워낙 좋아하고 존경하는 분이라 함부로 곡을 쓸 수가 없었다"며 웃음을 터트렸다.
2008년 소녀시대의 곡 '오빠 나빠'로 데뷔한 황현은 K팝 작곡가로 본격 변신, 프로덕션 모노트리도 11년째 운영하고 있다. 프리랜서 작곡가들이 크루 형식으로 모여 일하는 게 일반적이었던 당시 이례적으로 법인을 설립해 시스템을 갖췄다. 지난해 10월 모노트리는 설립 10주년을 맞았다. 현재 29명의 계약 작가들이 모노트리에 소속돼 있다.

황현은 "예전엔 작곡가가 자기 곡도 PR해야 하고, 프로모션부터 정산까지 혼자 다 해야 했다. 음악은 잘해도 사회관계를 형성하기 어려워서 활동하지 못하는 작가들이 생겼다. 시스템화가 되면 여건이 좋아질 수 있겠다고 생각해 시작한 게 모노트리"라고 설명했다.

모노트리는 2023년 SM엔터테인먼트의 퍼블리싱 자회사인 크리에이션뮤직라이츠(KMR)에 인수됐다. KMR의 CIC(사내독립기업)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황현은 "대표와 작곡가 일을 병행하며 과포화가 온 상태였다. 모노트리를 더 키우기 위한 방법이 합병이었다"면서 "노르웨이의 작곡가 그룹인 디자인 뮤직이 20주년이 된 걸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일단 우리도 20주년까지 해보자는 생각이고, 좋은 작가들이 좋은 곡을 쓸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는 설립 목적을 계속 지켜나가려 한다"고 강조했다.

화려하진 않아도 꾸준하고 묵묵하게 도전한다는 점에서 모노트리와 온앤오프를 '닮은 꼴'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황현은 "모노트리 역시 지칠 법도 한데, 지치지 않고 무던히 계속 새로움을 추구했다. 그 덕분에 지금까지 온 게 아닐까 싶다. 온앤오프와 비슷한 느낌"이라며 미소 지었다.

물론 창작의 고통은 늘 따른다. 시대는 빠르게 변화하고, 사람들은 새로움을 추구한다. 아이브 '키치'의 현실적이면서도 공감이 가는 통통 튀는 가사에도 황현이 참여했다. 지난 4일 기준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등록된 그의 곡만 무려 265곡이다. 황현은 "매번 힘듦을 갱신한다"고 말했다. 특히 온앤오프는 오랜 시간 프로듀싱해왔기 때문에 "이전보다 더 좋아야 한다는 강박감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뜨거웠다. "지치지 않고 오래 음악 하는 게 인생의 챌린지"라고 했다. "매번 힘들고 산 넘어 산이에요. 그런데 더 이상 오를 산이 없으면 되게 별로일 거 같아요. 힘들지 않고 잘 되면 별로 기쁘지도 않을 것 같고요. 오히려 안 힘들면 크리에이티브의 혈이 막힐 수도 있습니다. 힘들어서 다행이에요. 그게 크리에이티브함을 끌어내는 것 같거든요."(웃음)

K컬처의 화려함 뒤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땀방울이 있습니다. 작은 글씨로 알알이 박힌 크레딧 속 이름들.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스포트라이트 밖의 이야기들. '크레딧&'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을 하는 크레딧 너머의 세상을 연결(&)해 봅니다.

김수영 한경닷컴 기자 swimmingk@hankyung.com